결아 안녕?
유월이 시작되었어.
열두 달 중 가장 부드러운 발음을 가진 유월이 나는 좋아.
유월이 되면 사람들은 벌써 일 년이 반이나 지나갔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 같아. 하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아, 그냥 무사히 봄을 보내고 가을이 가까워지는 기분을 가만히 바라보곤 해. 긴장이 풀리고 나른하고, 조금은 막막하기도 한 그 기분을 마주하며 여름을 맞이할 준비를 해.
편지를 쓰는 지금은 아침이 지나가고 오후가 막 찾아온 한시인데 하늘은 시간을 알아차릴 수 없게 구름이 꽉 자리 잡고 있어. 비가 올 모양이야. 지난봄부터, 아니 겨울부터 산불 소식이 참 많았어. 내 친구 중에 산불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친구가 있는데, 불이 났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그 친구 생각이 났어. 항상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그 친구의 마음을 나는 자주 까먹곤 해. 오늘은 그 친구 생각이 많이 나네.
네가 이 편지를 받아볼 즈음에는 비가 오고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코로나19 확진자 소식은 꾸준하지만, 3년 전에 멈춰있던 많은 것들의 바퀴가 다시 굴러가고 있는 것 같아. 특히 오프라인 행사들이 그러한 것 같아. 여기저기 페스티벌 소식이 들려오고, 아이돌들의 대학 축제 영상이 sns에 많이 뜨더라고. 그걸 보면서, 맞아 이런 게 있었지 하며 작게 놀라곤 했어.
나는 <서울 국제 도서전>에 다녀왔어. 코엑스에서 열리는 건 3년 만이라고 해. 독서 인구는 매년 줄어들고 있다지만 행사장에는 공간이 찢어질 듯 사람이 많았어. 책 좋아한다는 사람들의 실체..?를 보는 일이 드문데 저마다의 방식으로 책을 보고, 사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는 게 귀한 경험이었어. 하나 안타까웠던 점은 사고 싶은 책이 많은데 그 마음을 무수히 억눌러야 했다는 거야. 지금도 내 방 크기에 비해 책이 너무 많거든. 그래도 참지 못하고 두 권을 사 왔어. 편지 말미에 어떤 책을 샀는지 소개할게.
이번 도서전은 독서 모임을 함께하고 있는 Y님과 함께 관람했어. 그리고 Y님과 바로 그 다음 날 같이 미술관에도 다녀왔지. 나는 거절 받을 게 걱정돼서 남들한테 뭐 같이 하자고 말을 잘 못 하는 사람이거든. 근데 내일 미술관 갈까 고민이라는 Y님에게 냅다 ‘같이 가요!’라고 말해버렸지. ‘같이 가도 될까요?’ 질문형도 아닌 청유형으로. 내게는 낯선 경험이라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았어. 일단 도서전 열기에 나를 통제하는 힘이 조금 느슨해졌던 것 같기도 하고(근데 이 힘을 조금 많이 빼는 게 좋겠다고 요즘 생각 중이야), 예전에 비슷한 상황에서 Y님이 나한테 뭘 같이 하자고 했던 적이 있었거든, 그래서 조금 용감해졌던 것 같아.
Y님과 함께한 미술관 나들이는 같이 가자고 말 안 했으면 어쩔 뻔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웠어. 우리가 간 미술관은 서울 대공원 안쪽에 있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었는데, 전시도 전시였지만 미술관을 오가는 길이 아름다웠어. 호수와 장미 정원을 가로지르는 리프트를 타고 미술관에 갔고, 내려오는 길에 발견한 호수 앞 숲에 앉아서 3시간 내리 이야기를 나누었어. 진한 풀 향기와 물기를 넉넉하게 품은 공기의 무게가 미지근한 바람에 실려왔는데, 아 초여름이구나 생각했어. 그리고 지난주에 네게 건넸던 질문이 떠올랐지.
초여름을 지나고 있는 관계가 있느냐고 물었었지? 너에게 그 질문을 건네던 때에는 지금 나에게는 그런 관계가 없다 여겼었어. 그런데 Y님과 함께 보낸 날 일기를 쓰다가 문득 Y님과 내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초여름에 있구나 생각했어. 어떤 말을 나누어도 파르르 불이 붙어 타오르던 걸, 말이 쌓일 때마다 무언가 자라는 느낌이 들었던 걸 떠올리면서.
나에게 초여름은 귀한 계절이야. 잔뜩 자라기 전에 하는 준비운동 같은 계절. 많은 것들이 이 계절의 문턱에서 긴장을 풀고 한껏 몸을 부풀린다고 생각해. 바깥이 온통 나를 자라나게 하는 것들로 가득하니까. 두려움이 압도되어 버리는 거지. 나도 초여름 앞에서는 그런 것 같아. 관계에서 생각이 많고 그에 비례해 두려움도 큰 편이지만 초여름에는 그런 것들이 흐려지거든. 자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져서.
Y님과 내가 많이 다른 사람이라는 건, 모임을 하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던 사실이야.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관계를 대하는 태도도, 저녁의 루틴도, 자신을 대하는 방법도 우리는 다르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돗자리 취향도 극명하게 달라(사진을 찍어두었으니 함께 보낼게).
나와 다른 사람 앞에서는 더 많이 긴장하기 마련이라 Y님을 조심스럽게 대해왔던 것 같아 그런데 지금은 흥미롭고 궁금한 마음이 훌쩍훌쩍 선을 넘게 해. Y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내 앞의 이 사람이 내게 상처를 주었던 옛 인연을 닮았다는 걸 조금은 느꼈는데 (아마 Y님도 그랬을 것 같아) 개의치 않았어. 상처는 드러냈을 때 힘을 잃게 된다는 걸 알고 있어서 인지, 아니면 이번은 다를 거라는 믿음 때문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 둘 다 맞을 거야. 그리고 그 믿음이 틀리지 않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어.
혹시 이런 내가 걱정되니? (웃음)
이런 무모함은 초여름이라 가능한 일일지도 몰라.
두려움을 잊게 해주는 계절이라니 정말 대단하고 위험하지 않니? 그래도 지금은 다른 생각하지 않고 눈앞에 있는 이 계절을 마음껏 즐기고 싶어. 너도 너의 초여름을 잘 맞이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에어컨 리모컨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이런 편지를 썼더니 여름이 더 기다려지네.
그래서 이번에도 너에게 여름과 관련된 질문을 건네고 싶어.
네가 여름 하면 떠올리는 영화와 노래가 궁금해.
(나도 한 주 동안 생각해보고 다음 편지에 나눌게:)
한여름이 된다면 아마 무더위에 녹초가 되겠지만, 여름의 초입에서 여름을 생각하고 기다리는 일은 즐거운 일인 것 같아. 관념 속의 여름은 언제나 안전하고 청량하기만 하니까. (웃음)
그럼 결아, 우리 이번 한 주도 평안히 보내고 다음 주에 또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