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오늘 아침 일찍 집에서 나섰는데 햇빛은 벌써 한낮이 되어 있더라,
나무 그늘 아래에서만 겨우 눈을 뜰 수 있었어.
그래도 올려다본 나뭇잎 사이로 볕이 윤슬처럼 빛나는 게 아름다웠어.
너도 아름다운 것들을 눈에 담으며 지내고 있니?
나는 조금 무기력한 한 주를 보냈어. 딱히 그럴 이유가 없어서 더 답답했던 것 같아.
그래서 수요일 즈음이었나? '이대로는 안돼!' 하면서 30만 원 하는 소설 수업을 신청했어. 그러니까 마음에 금세 의욕이 돌더라, 의지를 돈 주고 산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웃음)
그 수업의 준비물이 뭔지 알아? 바로 거의 완성했거나 완성한 단편소설 한 편이야.
몇 편 써둔 게 있지만 이번에 새로 구상하고 초입을 쓰고 있는 소설 피드백을 받고 싶어서 밤마다 써보는 중이야. 이 여름에 작은 목표 하나가 생긴 거지. 가을이 오기 전에 이 소설을 탈고하는 것.
내 소설은 항상 어떤 장면에서 시작해.
가령, 동네 친구들이 모여 글쓰기 모임을 하는 장면이라거나
그늘 한 점 없는 땡볕 아래를 느린 걸음으로 걷는 장면,
죽은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 같은 거 말이야.
이번 소설의 장면은 어느 날 버스 안에서 떠올랐어.
그 버스는 강을 지나고 있었는데, 그날 노을이 참 예뻤어.
그런데 자리 선정을 잘못해서 노을의 온전한 모습을 감상할 수 없어서 애가 탔지.
그때 한 인물이 떠올랐어.
이 버스에 올라타서 자연스럽게 노을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는 인물이.
생활력은 없지만, 그래서 야채 손질하는 법도 모르고 살림살이를 관리하는 일에 서툴고 손도 무뎌서 뭘 자꾸 쏟고 부수고 망치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는 법에는 환한 사람.
그 사람에 대해 쓰고 싶었어. 그리고 그 사람을 서서히 좋아하고 아끼게 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 둘이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이야.
지금 그 둘은 이미 노을을 함께 보았고
다른 아름다운 것들도 같이 보고 있어, 그리고 더 보게 될 거야.
그들이 보는 아름다움들은
언젠가 내가 보았던 풍경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겨우내 먹을 저장 음식들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내게 아름답고 힘이 되는 장면들을 소설 속에 꼭꼭 담아두고 있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 먹으려고.
그리고 두 인물이 관계 맺는 걸 보고 있으면 왠지 위로가 돼.
둘은 부서가 다른 먼 직장 동료인 설정인데, 조심성 없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용감하고 투명해 보여. 나도 그러고 싶은지도 몰라.
소설을 쓰다가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어.
'왜 이렇게 잘 써지지?' 하는 배부른 물음이야.
(근데 정말 놀랍다니까, 30분에 한 두장을 뚝딱 써버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이 소설의 동력이 되는 현실의 관계가 있더라고.
혹시 예상되니? 맞아. 지난주에 말했던 독서모임원 분이야.
반년 동안 모임에서만 짧게 보다가
최근 우연과 의지가 겹쳐 같이 전시장도 가고, 도서전도 가고, 미술관과 공원에도 갔지. 소설 속 인물들과 우리가 닮은 구석은 없지만, 시작하는 관계라는 점에서는 같아.
오늘도 그분과 밤늦게까지 산책을 했어.
그리고 헤어질 즈음 참지 못하고 그분에게 이렇게 말했어.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소설의 동력이 우리 관계인 것 같아요. 소설이 완성되면 제일 먼저 보여 드릴게요."
그분은 웃으면서 언제 볼 수 있냐고 농담 섞인 재촉을 하셨지.
그 순간도 또 하나의 동력이 되었어.
사람 만나는 게 왜 이렇게 재미있고 좋을까?
답이 없는 질문을 해봐.
물론 관계를 유지하다 보면 온갖 다채로운 힘든 감정들도 마주하게 되지만
그걸 수없이 겪었으면서도 또 사람을 찾게 되는 것 같아.
소설 속에 그 바램과 흉터, 반짝임과 흔적을 담아두고 싶은 게 요즘 내 마음이야.
그 마음은 박제, 수집, 보존, 보호, 미련 어떤 단어와도 어울리는 것 같아.
눈에 보이는 것은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두면 되지만
내가 오래 간직하고 싶은 건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아서
자꾸 글을 쓰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 너에게 내가 묻고 싶은 건,
내게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렇듯
너에게도 오래 간직하고 수집하고 곁에 두고 싶은 게 있는지 궁금해.
실체가 있는 무엇이라도 좋고, 나처럼 추상적인 무엇을 이야기해주어도 좋을 것 같아.
결아, 이제 유월도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어.
한여름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야기겠지?
땅에도 식물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어느 때보다 물이 필요한 날들이 이어질 것 같아. 누군가의 손을 잡듯 편안히 쥐어지는 물통을 하나 마련해서 곁에 두길 추천해:)
그럼 우리 다음 주에 또 만나자.
2022.06.12. 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