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에게,
결아 안녕?
한 주를 보내며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가만히 책상에 앉아 너에게 편지를 쓰는 지금을 말이야.
날마다 너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떠올랐던 한 주였어.
무엇이 궁금하다는 건 내게 좋은 징후야.
주어진 날들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진심으로 살아갈 때 질문이 많아지거든.
하지만 무수한 질문을 한통의 편지에 모두 쏟아낼 수는 없으니, 어젯밤 질문들을 노트에 옮겨 적고 그중 한 가지를 골라보았어.
그 질문은 지난 토요일, 취기가 오른 채 집으로 돌아가던 지하철 안에서 떠올린 질문이었어.
그 토요일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아름다움이 용량을 초과한 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아침에는 애프터양(AFTER YANG)이라는 영화를 보았어. 구름이 가득해 파란빛 하나 없었던 그날의 하늘과 닮은 희미하고 몽롱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는데, 끝나고 나오는 길에 보니 마음이 다 개어 있더라고.
혹시 네가 그 영화 볼 계획이 있을까 봐 스포일러가 될 말은 못 하겠지만, 우리가 평소 가까이 두고 있음에도 자주 잊는 삶의 미세한 아름다움을 상기할 수 있게 해주는 영화였어.
영화에서는 다양한 사랑의 결을 보여주는데 그중에서도 남매의 사랑, 오빠에게서 동생으로 흐르는 사랑이 인상 깊었어. 구김 없고 복잡하지 않은 그 순도 높은 사랑이 한없이 아름답게 느껴졌어.
오후에는 독서모임이 있었어, 마침 우리가 선정한 책에 대한 강연회가 열려서 함께 들으러 갔지. 열 번째 편지에서도 소개했던 <사랑에 대답하는 시>가 이번 달 모임 도서였어. 강연은 서울 은평구에 있는 '내를 건너 숲으로'(이름이 너무 예쁘지?)라는 도서관에서 진행되었는데 흐리고 어두운 토요일 오후, 사랑 이야기를 듣겠다고 도서관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이 귀여웠어. 그리고 강연을 기획한 직원분들의 다정하고 열정 넘치는 모습도 그곳에서의 경험을 더 귀하게 만들어 주었어. 강연은 <사랑에 대답하는 시>의 저자들 중 강혜빈 시인님, 그리고 목정원 작가님이 진행해 주셨어.
목정원 작가님의 말씀 중 '사랑의 효능은 지탱'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아. 그리고 서로를 지탱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이별하는 게 용기라는 말도.
사랑의 효능이 지탱이라는 것에는 고개가 쉬이 끄덕여지지만,
사랑의 목적이, 또는 사랑의 발발, 존재 이유, 가치가 그것이라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서로를 지탱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 이별해야 한다'라는 공식에는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어.
다만, 그 말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매번 내가 하는 다짐은 이런 종류였어.
"사랑, 잘 해보자!"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별은 '사랑의 실패'가 되곤 해. 그런데 어쩌면 이별이 사랑의 끝이 아니라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이별 후에도 끝나지 않는 사랑은 흔하고, 이별 후에 시작되는 사랑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 다음에는 '이별을 잘 해보아야 겠다'라는 생각을 했어. 이별을 피하느라 앞선 사랑을 망치지 말고 용기를 내보자는 말을 미래의 나에게 넌지시 건네보았어.
강연이 끝나고는 모임원분들과 예능에 나온 적이 있는 우동집을 찾아갔어(홍제동 우동국수라는 곳이야). 얇은 면과 넉넉한 쑥갓 고명이 취향에 맞았지만 그리 특별한 맛은 아니었어. 하지만 식당으로 가던 택시 안에서 모임원분이 했던 어떤 말을 곱씹어 보느라 마음이 두근두근해서 우동이 더 맛있게 느껴졌어. 그 말을 최대한 비슷하게 옮겨 볼게.
"아까 강연에서 사랑은 티가 난다고, 증상이 나타난다는 말이 있었잖아요. 그 말을 들으면서 떠오른 게, 제가 어제도 계속 일하고 거의 밤을 새고 여기 와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내가 이 모임을 진짜 사랑하는구나 깨달았어요."
당시에는 함께 있던 다른 모임원분께 "우리가 잘 해야겠네, 잘 하자!"라는 농담으로 대화를 마무리했지만, 더 길게 듣고 싶은 말이었어. 신기했거든.
사실 강제성이 없는 모임이라는 게 그렇잖아. 아주 좋다가도 상황에 따라 쉬이 사라지곤 하는. 그런 존재를 사랑하기는 어렵지. 아니다. 그럼으로 더 사랑하기 쉬울 수 있지만 그 사랑을 스스로 인정하고 간직하고, 발화하는 일은 나에게 위험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 (사랑은 인지하고, 고백하는 순간 더 증폭되기도 하니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모임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그분을 보면서 나는 약간의 경외심을 느꼈던 것 같아. 사랑 앞에서 용감한 사람들은 언제 보아도 정말 멋있어. 놀랍고, 짜릿해. (웃음)
"우리 잘 하자"라고 했지만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예정이야.
사실 나도 이 모임을 사랑해왔으니, 하던 대로 하면 될 것 같아.
그리고 이날의 마지막 일정은 대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낸 언니와 가진 술자리였어. 특별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지만 언니 앞에서 내가 아무런 방어기제도 사용하지 않고 편히 있는 걸 보면서 앞에 있는 사람이 귀하게 느껴졌어, 고맙기도 하고.
가끔 이 언니를 떠올릴 때
아지트, 기지 같은 단어가 생각났는데 그만큼 무장해제를 하고도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우리가 시킨 칵테일은 별로 안전하지 않았던 것 같아. 도수가 꽤 높았는지 취기가 빠르게 오르더라고. (웃음)
거하게 취하진 않았지만 균형 감각을 조금 상실한 몸을 이끌고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 집에 도착했어.
아름다움이 어느 작물처럼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어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밀어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이 피어나고 열매 맺었을지 모르겠어.
그 열매 중 단내가 진하게 풍겨오는 것들을 몇 알 골라 너에게 건넨다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어. 그리고 나는 이제 네가 가진 열매의 모양과 향이 궁금해.
그러니까 오늘 내가 건넬 질문은
너의 아름다운 장면들을 알려달라는 거야.
나는 글로 썼지만 사진이나 영상, 노래 어느 형태로든 건네주어도 기쁠 것 같아.
긴 장마가 시작된다는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와. 많은 강이 가물어 바닥을 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이번 장마에는 '빨래 어떻게 말리지'하는 근심 보다는 안심되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아.
음, 그리고 나는 '장마'에 여러 기억과 의미들을 많이 담으며 살아왔거든. 앞으로의 편지에서 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조금 기대되기도 해. 너에게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말들이거든.
그럼 우리 다음 주에 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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