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오늘은 동네 카페에 와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너른 창으로는 반죽처럼 뭉개진 구름들이 보이고, 나란히 앉은 사람의 책 읽는 움직임이 곁눈으로 느껴져. 뒷자리에 앉은 연인은 느린 호흡으로 꾸준히 다투고 있어. 아무 생각 없이 시킨 치즈 브라우니를 한입 떠먹었는데 따듯하고 부드러워서 조금 감동받았어. 함께 주문한 페퍼민트 티의 청량함과 잘 어울리는 단맛이야.
이번 주는 바람이 좋은 날들이 이어졌어. 지난주만 해도 높은 습도에, 바깥을 걸을 때면 얼른 에어컨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었거든. 그런데 이번 주에는 나무 그늘 아래에만 서도 금방 땀이 식어서, 그곳에서 나무를 올려다보며 찍은 사진이 많아.
매미 소리를 처음 들은 날들이기도 했어. 어느 날 아침,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자세로 잠에서 깼는데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어. 뭐가 다르지? 정신을 모아 생각했는데 바로 매미 소리였어. 내 방 창 멀지 않은 곳에 가로수들이 줄지어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알게 되니 왠지 든든했어.
옥상에 올라가 일몰 사진과 구름 사진을 찍기도 했어. 휴대폰 카메라로 찍다가 색감이 과장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후다닥 내려가서 DSLR 카메라를 가지고 왔어. 그 사이 하늘빛이 바뀌어 있어 아쉬워하면서도 그 새로운 빛에 마음이 환해지던, 그런 날도 있었어.
여름의 안부 인사를 전해 들은 기분이었어. 여름에게서 ‘안녕, 나는 잘 지내고 있어’라는 편지를 받은 기분. 그 여름 안에서 나도 조금은 자연스러운 날들을 보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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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언니에게 얼마 전 마음이 상한 일이 있었어. 언니가 내 마음을 상하게 할 의도도 없었고, 당시 내 기분도 크게 나쁘진 않았는데 그 일이 잊히지 않았어.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겠지 하고 그냥 두었는데 오히려 여러 감정이 섞여 몸집을 불려 나갔어. 언니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어서 머리가 아팠어. 언니랑 알고 지낸 10년 동안 그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거든.
좋아하는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글을 쓴 날이 있었어. 글을 마음에 들게 마무리하고 남은 샌드위치를 먹고 나서려는데, 지금 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 카페에는 도시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테라스가 있어. 그곳에 앉아 눈물이 새어 나오는 눈을 꾹꾹 누르면서 언니랑 통화를 했어. 모든 말이 조심스러웠고, 무서웠지만 동시에 해방감을 느꼈어.
그리고 며칠 후 만난 언니에게 귀여운 하늘색 꽃자수 양말을 받았어. 선물을 주면서 언니가 함께 있던 다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어.
‘민경이가 나 때문에 삐졌어서 준비한 거야’
너무 힘들고 고민스러웠던 감정을 토로할 때 ‘삐졌다’라는 말로 내 감정을 정리하는 걸 싫어했었거든. 근데 언니 입에서 나온 그 ‘삐졌다’라는 말을 듣고서는 안심이 되었어. 그 일이 삐짐이라는 가벼운 말로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게 좋았어. 나 혼자 가지고 있을 때는 너무 무거웠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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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아, 너는 언제 억울함을 느끼는 편이야? 나는 내가 타고난 기질에 대해 생각할 때 자주 억울함을 느끼곤 해. 언니에게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한결 가벼워져 카페를 나오던 그 순간에도 나는 옅은 억울함을 느꼈어. 작은 일에도 쉬이 마음이 상하는 나의 무름이 싫었고, 상한 마음을 나누는 걸 가로막는 나의 불안이 미웠어. 그럼에도 계속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 많은 걸 나누고 싶어 하는 무모함이 바보 같았고.
그런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런 기질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어. 무르기 때문에 유연한 마음을, 불안 덕에 피할 수 있었던 상처들을, 무모하게 다가선 곳에서 발견한 아름다움들을 생각했어. 하지만 동시에 그것으로 나를 위로하는 게 좋지 않다는 판단이 섰어. 그럼 그것들에 집착하게 될 테니까, 그것들을 얻지 못할 때 더 큰 억울함을 느끼게 될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냥 나의 기질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어. 그러니까 ‘나는 왜 이렇게 생겨 먹었을까’하는 억울함도, ‘그래도 이런 걸 얻을 수 있잖아’하는 위안도 사라지고 해방감을 느꼈어. 뭉쳐있던 감정들이 흩어지고, 그 자리에서 자유가 시작되는 게 느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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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기쁨, 재미에 나는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고 큰 만족을 느껴왔었어. 하지만 요즘은 자유로움에 대해 더 관심이 많아. 예전에는 행복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과 자유로움을 동일시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다르다는 걸 알아.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까?’ 보단 ‘어떻게 하면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더 자주 하는 것 같아. 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하기로 한 것도 이런 생각에 기반했던 것 같아. 언니는 좋은 사람이고, 나는 언니랑 있을 때 행복해.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는 건 좋은 사람을 멀리 보내고, 그 기쁨을 깨어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나의 자연스러운 마음이었기 때문에, 말하기를 선택한 거야.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말하기. 누군가 그것보다 쉬운 일이 있겠냐 물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아직 연습이 많이 필요한 일인 것 같아. 마음은 언어 상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언어로 바꾸는 일에도 노력이 필요하고, 그걸 전달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최소화하는 데 공을 들이고 싶거든. 이때까지는 그게 힘들어서 시간의 흐름에 어떤 마음을 던지기도 했고, 끝내 말하지 않기를 선택하기도 한 것 같아. 그 과정에서 나는 점점 더 부자연스러워졌었겠지? 하지만 앞으로는 가능한 그러지 않을 거니까, 그 생각만으로도 호흡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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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아, 오늘도 네 마음에 대한 질문을 하나 건네고 싶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말을 건네야 할 때 너의 마음은 어떤지,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무엇인지 말이야. 그리고 끝내 말하지 않기를 선택한 순간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마음으로 그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듣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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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쓰는 동안 해가 다 졌어. 아까 본 하늘이 전생의 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창밖이 컴컴해. 조금 전에는 가로등 불이 들어오고, 카페 마당에 길게 늘어선 알전구에도 빛이 들어왔어. 불이 켜지는 그 순간을 눈에 담을 수 있었는데, 그 찰나를 목격했다는 것에 마음이 쉽게도 들뜨더라.
여름에는 한순간 바뀌어 버리는 풍경들이 가득하지. 해 질 녘의 하늘, 구름, 나무들, 꽃들, 나비와 개미, 모기와 초파리, 과일들, 소나기, 고양이, 웅덩이, 흙과 산들. 모든 게 빠르게 자라나고 있는 것 같아.
모든 것이 자라나는 이 계절에는 그 황홀한 풍경들이 흔해지고,
그 속에 선 나도 왠지 조금 자라나는 것 같기도 해.
우리 여름의 안부를 종종 받아보며 잘 지내다가,
다음 주에 다시 만나자.
어쩌면 한 뼘 더 자란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