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이번 주에는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바쁜 날들을 보냈어. 회사 일도 그렇고, 개인적으로 벌려놓은 일들의 마감이 몰린 주였거든. 더군다나 금요일에는 서울에 친구가 놀러 와서 휴가까지 써놓은 상태였어. 아직 끝나지 않은 일 투성이지만, 그래도 이번 주에 계획했던 일들은 얼추 마무리되었어. 너에게 쓰는 이 편지가 이번 주의 마지막 일정이야. 너는 아마 다음 주를 시작하며 이 편지를 읽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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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기다렸던 영화가 하나 있어. <썸머 필름을 타고>라는 일본 영화인데, 계절에 딱 맞게 이번 주에 개봉해주었지. 약간 바랜 듯 푸른 포스터부터 ‘나 여름 영화야!’라고 말하고 있는 이 영화는 여름을 참 많이 닮았어. 단순히 여름 풍경이 많이 담겨 있어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고, 시시각각 바뀌는 인물들의 감정선과 관계가 여름처럼 느껴졌어. 직사광선처럼 곧고 단호하게 빛나는 느낌.
영화의 가장 중심이 되는 사건은, 감독 지망생인 고등학생 ‘맨발’이 영화 동아리에서 탈락한 자신의 작품 <무사의 청춘>을 친구들과 함께 완성하는 것이야.
(아래 문단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어서 혹시 원하지 않으면 다음 문단으로 바로 이동하길 바라!)
이삿짐을 나르며 제작비를 벌고, 자전거 조명에 조예가 깊은 친구를 조명 감독으로, 공 치는 소리만 듣고도 타자를 맞추는 친구를 음향 감독으로, 그리고 조금은 다른 세상에서 온 친구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기까지 하면서 말이야.
(이제 스포일러는 없어)
나는 ‘맨발’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마음을 보면서 언젠가 내가 좋아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어. ‘맨발’은 좋아하는 마음에 대가처럼 지불해야 하는 감정들, 가령 상실감이나 울분, 애처로움과 간절함 같은 감정들을 아끼지 않아. 그러니까,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에 한계를 두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
나는 이제껏 맨발과 다른 선택을 해왔어. 승부를 보지 않는 게 그것들을 지키는 길이라 생각했었거든. 연애에 비유하자면 고백하지 않는 쪽을 매번 선택했던 거지. ‘이건 취미니까’, ‘나만 좋으면 됐지’, ‘너무 애쓰지 말자’ 같은 말을 자신에게 건네면서 말이야. 그래서 좋아하는 일들이 ‘적당히’ 좋아하는 일로 남을 수 있도록. 결과는 어땠냐고? 내가 그것들을 좋아했던 것도 까맣게 잊을 정도로 그 마음들은 흐지부지 사라져 버렸어.
그것들을 충분히 좋아하지 못했다는 걸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어. 좋아하는 마음을 그렇게 마무리 지었다는 게 조금 후회스러웠어. 그래서 앞으로는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덜 타협하기로, 끝까지 가보기로 다짐했어.
이 생각은 자연스럽게 지금 쓰고 있는 소설에 닿았어. 언젠가 내가 소설을 쓰고 있다고 말했었지? (열한 번째 편지에서 말했었어) 그 소설의 마감이 다음 주 목요일로 다가왔어. 음, 생각 없이 쓸 때는 마냥 재미있었는데 곧 수업 시간에 합평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해지더라고. 막막함은 곧 초조함과 답답함을 만나 두려움에까지 닿았지. 그래서 만약 잘 풀리지 않는다면 다른 수업에서 꽤 좋은 평을 들었던 소설을 그냥 조금 고쳐 내자고 스스로에게 여지를 주기도 했고. 정면 승부하는 게 무서워서, 내 소설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평가하려고 하기도 했지. 예를 들어서, 피곤한 와중에도 매일 새벽 3시까지 글을 썼으니 그것만으로 대단한 거 아니냐는 식으로 말이야. 명백하게 모순이 있는 설정을 끝까지 고민하지 않고, 누가 이런 것까지 캐치하겠어? 하고 넘기려 하기도 했고 말이야.
그런 마음들의 기저에는 같은 종류의 두려움이 있었어. 최선을 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최선을 다한 소설이 나쁜 평을 받는다면 좌절하게 될 테니까. ‘더 잘 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 상태’에서 집필을 마치고 평가받는다면 나쁜 말을 들어도 ‘뭐…최선을 다한 것도 아닌데’라고 위로할 수 있으니까. 말 그대로 승부를 피한 거지. 이런 마음들 때문에 소설을 잘 완성하고 싶고, 소설 쓰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구석에 밀려있었어. 그런데 다행히 영화를 보고 다시 그 마음이 중심으로 돌아왔어. 애매하게 두었던 부분들을 신경 써 고쳤고, 나도 잘 몰라서 뭉뚱그린 감정들을 세밀하게 살피거나 과감하게 삭제했어. 공격받게 될지도 모르는 모난 부분들도 필요하다 판단되면 그대로 두는 편을 선택했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장면을 고치고 있어.
소설에 집중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인물들과 더 친해지는 기분이 들었어. 20대 후반이 된 후로는 가상의 인물들에게 몰입하고 그들의 실존을 믿는 일이 어려웠는데, 오랜만에 내 소설 속 인물들이 어딘가에서 정말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제 소설에는 한 장면만을 남겨두었어. 두 인물이 함께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공섬에 가는 장면인데 그 섬에서 그 인물들이 어떤 대화를 나눌지 아직 나도 몰라. 함께 그 섬을 따라 걸으며 그들이 눈에 담는 것을 함께 보며, 나누는 대화를 엿들으며, 흘러나온 마음을 그러안아 그대로 써볼 생각이야.
앞으로 좋아할 것들에 대해서도 이렇게 예의를 차리고 싶어. 마음껏 좋아하고, 승부를 보아야 할 때는 승부를 보기. 흐지부지 마음들이 흩어지는 걸 눈 가리고 아웅 하지 않기.
이 마음의 흐름을 따라서 너에게 오늘 이 질문을 건네고 싶어.
네가 가진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 중 가장 지키고 싶은 게 무엇인지 궁금해. 음… <노력>이라는 노래에서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묻듯이, 좋아하는 마음을 지킨다는 말이 좀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마음에는 항상 어떠한 노력이 동반된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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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에 독서모임에 다녀왔는데 말이야, 모임을 마칠 때쯤 다들 다음 일정이 무엇인지 공유했었어. 일요일 저녁인데도 각자 회사일, 글 마감, 공연 연습 등 일정이 있더라고. 나도 일정이 차 있었고 말이야. 그 와중에도 잠깐 모여 책 이야기를 하려고 한 시간씩 걸려 모임 장소에 온 우리들이 조금… 귀여웠어. (웃음) 그리고 어쩌면 다들 노력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 말이야.
무언가를 계속 좋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들을 이제 눈여겨보게 될 것 같아. 사람들이 참 귀여워지는 순간들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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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비 소식이 가득했는데, 이제 남은 여름은 물기 없이 내내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거라는 소문이 무성해. 정말일까?
그날들이 조금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그럼 그 날들이 지나면 곧바로 가을이 오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좀 싱숭생숭하기도 해. 굳이 순위를 정하자면 가을은 내가 가장 기다리는 계절이고, 여름은 그 반대인데, 그럼 이 환절기에는 기뻐할 시간도 모자란 게 맞는데 나는 모든 끝맺음에 약한 편이거든. (대학 때는 싫어하는 수업 종강하는 것도 슬퍼하곤 했어) 그래서 마음이 좀 그래. 그래도 매주 이렇게 편지를 쓰며, 이번 환절기를 한번 꼬박 잘 지내볼게.
조금 이른 다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결아, 이번 한주도 무사히 잘 지내고,
우리 곧 다시 만나자.
2022.07.24. 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