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유난히 습했던 한 주 끝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빨래를 돌리는 날이면 습도를 확인해보곤 하는데, 매번 80이 훌쩍 넘어서 그리 덥지도 않은 방에 에어컨을 틀어야 했어. 바깥을 걸을 때면 혹시 내가 미지근한 물이 채워진 어항 속을 걷고 있는 것 아닌지 헷갈리기도 했고 말이야. 그래도 내내 습한 하루 끝에서 참은 웃음을 터트리듯 내리는 비를 만날 때는 참 기뻤어. 우산이 없어 굵은 빗줄기를 그대로 맞은 날이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천천히 집으로 걸어 돌아갔지. 비를 맞아도 괜찮을 때 비를 만나는 일은 큰 행운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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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카페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귀가 자꾸 다른 쪽으로 열렸어. 10년도 더 전에 좋아했던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거든.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때 이야기를 조금 했어. 미술학원에서 자유화를 그리는 날이면 그 가수의 앨범 자켓 사진을 수채화로 따라 그렸다고, 그걸 팬 카페에 올리고, 댓글을 달아 준 사람과 문자를 나누며 친구가 되었다고. 그 친구는 영월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나는 영월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사회과부도 책을 펴보며 ‘강원도구나’ 했던 게 떠올라.
오랜만에 옛날 생각을 해서 그런지, 옛일기들이 궁금해졌어. 그래서 대학생 때 일기를 쓰던 블로그에 들어가 보았지. 대학 마지막 학기 시절 일기들을 읽었는데, 수업이 별로 없어서 나른해 하면서도 그 평안 속에서 더 요란하게 불안이 들끓던 게 만져질 듯 선명하게 떠올랐어. 아름다운 날들이었지만, 날들이 벼려 있던 게, 그 날에 금방이라도 찔려 피를 콸콸 쏟을까 두려워했던 게 떠올라.
진로에 대한 고민 때문이기도 했지만, 의도치 않게, 또는 의도 아래 다른 존재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겹치면서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가 깊어지던 날들이었어.
나는 살아오면서 ‘다정해’라는 말을 종종 들어오곤 했는데, 그때는 누군가 건넨 그 말에 가장 깊이 베이곤 했어. 다른 존재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다정에 대해 말하는 것 또한 망설이곤 했어. ‘다정’을 입에 담을 자격 역시 없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럼에도 일기에는 다정한 풍경들이 기록되어 있었어, 몇몇 친구들이 일기를 읽어주었기에, 그럴 자격도 없으면서 다정 쪽으로 기우는 마음을 죄스러워 한다는 말은 적지 않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그 마음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
지금은 시간이 지나, 그때 듣기 힘들어했던 어떤 말에도 베이지 않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에 작은 진동이 일기는 해.
그때, 혼란한 마음으로 마주했던 다정한 풍경들을 지금에서야 조금 편안하게 바라봤어. 그중 하나를 너와 나누고 싶어. 2017년 가을에 쓴 일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