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 필링스>는 한국계 미국인이자 시인인 캐시 박 홍의 글을 엮어 만든 수필집이야. 책을 읽는 내내 아시아계 여성인 캐시 박 홍이 인종주의가 만연한 환경에서 경험한 ‘마이너 필링스’를 낱낱이 목격할 수 있어.
감정이란 사실 목격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작가가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고 언어화하는 능력이 너무나 뛰어나서, 마치 그 감정을 만지고, 또 내 마음에 넣어서 느껴본 것만 같기도 해. 실제로 내가 언젠가 느껴본 감정일지도 모르지만.
‘마이너 필링스’를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 언어화된 감정들을 읽으면서 ‘수치심’에 대해 오래 생각했어. 한때 ‘수치심’이라는 단어에 꽂힌 적이 있었거든.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비교한 어떤 글을 보았는데,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부끄러움은 타인의 평가를 기초로 한다는 점에서 수치심과 다르다고 했어. 즉, 수치심은 타인이 아닌 내가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때 생기는 감정이라는 거지. 심리학 용어로는 ‘자기-인식’ 감정이라 한다고 해. 투박하게 말하자면, 부끄러움이 인파가 넘치는 공공장소에서 벌거벗고 다닐 때 느끼는 감정이라면, 수치심은 혼자 있는 방 안에서 스스로를 부적절하게 평가할 때 느끼는 감정이야. 아무도 없는 방에서 스스로가 타자가 되어 자신을 평가하는 거지. 자신에 대한 성찰은 나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객관성을 상실하고 자신에 대해 더 가혹하고 왜곡된 평가를 할 위험도 있지.
몸이 좋지 않을 때, 나쁜 일이 연달아 일어날 때, 타인의 평가를 분별없이 받아들일 때, 나는 건강하지 않은 수치심에 빠지곤 해. 그럴 때마다 화해하지 못한 과거의 일들이 찾아오곤 하지. 화해하지 못한 과거란,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다시 경험하게 되는, 완결되지 않은 어떤 시기를 말해. 완결이라는 말보다는 ‘해결’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 과거가 되지 못한 과거에서, 나는 언제나 영악하고, 배은망덕하며, 현명하지 못하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저지르며, 가해자야. 그런 나에 대한 평가가 과하며, 왜곡되어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알면서도 비난을 멈추기 어려울 때가 있어. 그 일을 떠올리면 내가 너무 밉고 끔찍해지거든. 그래도 조금씩 그 과거들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어.
과거의 일이니까 덮어두고 잊자, 또는 ‘그럴 수 있지’라는 온정적인 태도는 나와 맞지 않더라고. 그래서 나는 그 일에 대해 글을 써보는 걸 선택했어. 그 과거들을 아주 건조하게 묘사해보기도 하고, 느낀 여러 감정에 대해 절절하게 써보기도 해. 다양한 각도로 그 일을 바라보고 기록하면 어느새 안심하는 나를 관찰할 수 있어. 내가 그 과거를 놓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똑같은 방식으로 또 화해하지 못할 기억을 만드는 게 무섭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 일들을 기록해두면 한 번 더 명심하게 되기도 하고, 까먹더라도 언제든 꺼내 볼 수 있으니까, 과거에 두어도 잊지 않을 수 있으니까 안심이 되더라고. 그렇게 마음이 조금 진정되면 그때의 나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것 같아. 과한 비난, 또는 연민을 거두고, 나를 바라보는 데 가끔 성공하곤 해. 물론 글 쓸 엄두가 나지 않는 일들도 아직 있지만 말이야.
그리고 수치심을 이겨내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어. ‘내가 꽤 괜찮게 느껴지는 때’ 목록을 만들어 수치심이 느껴질 때 하나씩 해보곤 해. 그 일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감정이 평안한 상태에 다다르게 되더라고. 몇 가지를 소개할게.
1. 독서 기록
- 읽은 책의 감상과 문장들을 기록, 좋은 문장들로 내가 채워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음.
2. 낯선 곳 산책
- 생각과 감정은 공간 의존적이기 때문에 새로운 곳으로 가면 감정을 덜어내거나 생각을 비울 수 있음.
3. 피아노 치기
- 크게 긴장하지 않고도 칠 수 있는 곡 연주, 몰입을 통해 생각과 감정을 비우고 그 자리를 고양감으로 채울 수 있음.
4. 글쓰기
- 일기든, 소설이든, 뭐든 쓰기. 기록이 남아 좋고, 생각과 감정을 언어화하며 그것에서 빠져나올 수 있음.
5. 밥 직접 해 먹기, 운동하기
- 나 스스로 먹이고 적절한 운동을 하는 일은 직관적으로 ‘나를 책임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수치심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 될 수 있음.
적기만 했는데도 왠지 힘이 나는 기분이야.
그래서 결아, 오늘은 너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싶어.
먼저, 네게도 화해하지 못한 과거가 있다면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궁금해. 그리고 너의 <내가 꽤 괜찮게 느껴지는 때> 목록이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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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번 한 주도 안녕히 지내다가,
다음 주에 다시 만나자.
2022.08.21. 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