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아 안녕, 민경이야.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20대 중반까지 내가 쓰는 대부분의 글에서는 항상 누군가 죽었어. 정확히 말하면 '죽어 있었어'. 누군가 죽은 후에 시작되는 이야기를 썼어. 에세이를 제외하고 말이야. 에세이가 제외된 이유는, 그때까지 나는 소중한 사람을 죽음으로 잃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서웠나 봐. 아직 내게 찾아오지 않은 상실이 나를 어떻게 무너지게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그게 글쓰기의 동력이 되었어.
글 속에는 누군가를 잃고 애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나와, 글을 쓰면서 그들과 함께 애도를 연습했어. 언젠가 그래야 할 때가 되면 잘 해내고 싶었거든. 사랑의 한 과정인 애도를. 빛나는 시간을 쥐었다면 기꺼이 감수해야 할 그 시간을 말이야.
내가 바라는 애도는 어떤 애도일까, 쓴 글들을 돌아보며 생각해봤어. 모두 다른 죽음, 다른 애도지만 내가 바라는 건 같아 보였어. 소설과 희곡은 이 편지에 담기에는 조금 넘쳐서, 짧은 시 하나를 옮길게. 스물두 살 때 썼던 시야.
벚나무
겨우내 눈이 머물렀던 자리를
꽃만으로 채우는 벚나무처럼
누군가 머물렀던 자리를
아름다움만으로 채울 수 있다면
그 순간이 오면, 사랑하는 누군가를 완전히 상실하는 순간이 오면, 아마 많이 울겠지. 밥을 먹으면서도, 아침에 일어나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샤워를 하면서도. 아마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일은 한동안 하지 못하게 될 거야. 그 울음을 부러 막지 않는 게 나는 애도의 첫 번째 단계라고 생각해. 대신, 한껏 운 뒤에는 그 울음을 기록할 거야. 많이 울 거지만 왜 우는지 모르고 우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울음에 갇혀 애도를 진행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눈물과 글쓰기로 감정을 조금 추스르고 난 후에는 아마 조금 개운함을 느끼기도 할 거야. 그럼 그 사람을, 또는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일도 가능하게 되겠지. 그럼 두 번째 단계를 시작할 준비가 된 거야. 그 단계에서는 애도의 대상과 관련된 기억들을 박제하는 일을 할 거야. 나는 글쓰기가 편해서 글로 하겠지만, 사람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 같아. 부재하는 사람과의 기억은 미화되기 쉽잖아. 그걸 잘 활용해서 기억들이 아름답게 기록될 수 있도록 할 거야. 사실 그 기억이 가진 다시 반복될 일 없다는 속성이, 어떤 아름다움 그 자체이긴 하지만 말이야. 마지막 단계에서는 그 사람을, 시절을 마음에 품은 상태로 잊을 거야. 첫 번째, 두 번째 단계를 잘 해냈다면 이 단계는 아마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될 거야. 이게 어떤 상태냐면 말이야, 어떤 모임에 가서 "저는 아직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이 없어서요"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상실을 잊고 지내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차 하며 옅은 죄책감과 해방감을 함께 느끼는 상태이고, 일상에 그 상실이 적극적으로 침투해오진 않지만 그 존재를 상기시키는 상황, 물건, 노래 등과 접촉하게 되면 도리없이 그 부재를 인지하여 두 손을 모으고 짧은 기도를 하게 되는 그런 상태야. 없지만 있고, 있지만 없는 상태. 가지고 살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고, 없이 살기에는 생의 의지가 꺾여 버릴 테니. 내가 선택한 애도의 종착지는 이런 모습이야.
작년 오월에 나는 첫 번째 상실을 경험했어. 어떤 존재와 헤어진 일은 그전에도 많았지만, 사별은 처음이었어. 살아있으니 언젠가 우연히라도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상실과, 그렇지 않은 상실은 같은 '상실'이라는 단어로 표현되기에는 나에게 너무나 달랐어. 앞서 말한 애도의 단계를 고스란히 거치며, 할머니는 내 일상에 있기도 하고 또 없기도 해. 얼마 전에는 절에 갔는데, 할머니가 불경 읊던 게 떠올라서, 예불 시간에 조용히 할머니의 안녕을 빌었어. 사후 세계를 믿지 않지만 그렇게 했어. 그리곤 예불이 끝난 후 절밥을 맛있게 먹었지. 어쩌면 내 첫 번째 애도는 안정기에 들어선 걸지도 모르겠어.
앞으로의 애도도 잘 해낼 수 있길, 사실 ‘앞으로의 애도’라는 단어를 쓸 때 주마등처럼, 예견된 상실들이 지나갔는데 잠깐 호흡이 멈추고 눈가가 시큰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떠난 자리를 오래 들여다보고, 쓰다듬어보면서 그 자리에 결국 아름다운 것이 피어나는 걸 보고야 말 거야. 그 아름다움으로 부재의 자리를 채우겠다는 건 아니야. 그 아름다움으로 부재의 자리가 감히 채워지거나 사라지지 않도록 할 거야. 애도는 빈자리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보존하는 일이니까.
가끔은 나를 상실한 내 주변 사람들이 나의 빈자리에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해지기도 해. 아마 나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나는 몇 년 전부터 긴긴 유서를 적고 있어. 노트북 바탕화면에 ‘남긴 글’ 폴더에 있는 ‘오늘은 바람이 많은 날이고’라는 제목의 파일이야. 생각이 날 때마다, 그리고 새로운 소중한 사람이 생길 때마다 그곳에 그들을 호명하며 몇 줄씩 글을 쓰고 있어. 대부분 고마움을 전하는 말들이고 가끔 미안해하고 또 더 가끔 당부의 말을 전하기도 해. 그리고 가을에 새로 시작하는 글쓰기 모임에서 글감으로 ‘나의 장례식 풍경’이라는 주제를 던져보려고 해. 글이 완성되면 ‘오늘은 바람이 많은 날이고’ 파일 안에 그대로 넣어두려고 해. 지금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장면들은 돌잔치인지 결혼식인지 장례식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야. 간단히 말하면 내 장례식은 지하에서 열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수목장을 하고 싶은데 나무 관리가 아무래도 어렵겠지? 엉엉 우는 자리 말고 동창회나 가족 행사 같은 분위기면 좋을 것 같아. 그러려면 나 꽤나 잘 죽어야 할지도 모르겠어.
결아, 오늘은 이 질문을 너에게 하고 싶어. 너를 잃은 사람들이 너의 빈자리에 어떻게 대처해주었으면 하는지 말이야. 장례식 풍경은 어땠으면 좋겠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으면 좋겠는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