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가까이하는 날들이야. 자주 슬픔을 느끼는데 우울로 빠지게 만드는 슬픔이 아니라, 생활의 깊이를 깨닫게 하는 양질의 슬픔이라 만족스러워하고 있어. 물론 이것도 잦으면 병처럼 느껴질 테지만.
오래전에 읽은 시의 구절이 떠오르기도 했어. 그 구절은 언젠가 몸에 새기고 싶어 했을 정도로 좋아했던 문장인데 오래 잊고 살았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기도 했어. 왜 잊었을까 생각해보았는데 말이야. 역설적이게도, 그 문장 가까이에 살았기에 그것을 잊고 산 것이 아닌가 싶어. 지금은 그 문장과 조금 멀어져서 분리불안 같은 걸 느끼고 그 문장을 다시 찾고 있는 것 같아.
“이별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 이토록 정다운 사람처럼”
- 박소란, 정다운 사람처럼 中
이 문장을 처음 보던 날, 나는 아마 한낮의 버스, 또는 한밤의 방 안이었을 텐데 그때 울었던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 문장을 읽고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었던 것 같아. 단지 이 문장만으로, 이 문장을 읽은 것만으로 몸에 일어난 변화를 그대로 마주하며 시의 힘에 대해서도 얼마간 생각했겠지. 가빠진 호흡과 흐릿한 시야, 그리고 경직된 승모근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 후 다시 이 문장을 보고, 또다시 그 변화들을 겪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 거야. 이 문장을 쉽게 외워버리고, 그것을 되뇌며 며칠을 외롭지 않게 보냈을 거야.
저 문장이 왜 이렇게 좋을까. 많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저 문장이 '바보 같지만 버리고 싶지 않은' 나의 한 부분을 내가 계속 품을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야.
사람이든, 상황이든 무엇이든, 나는 어떤 것과 관계 맺을 때, 끝을 생각하지 않아. 영원은 드문데도 모든 것이 영원할 거라는 전제를 나도 모르게 깔아버리지. 그래서 상실이 매번 너무 힘들었어. 상실의 가능성을 배제했기에 언제나 그것이 너무 갑작스럽고 말도 안 되는 일로 다가왔거든.
그래서 나는 자주 우는 사람이되었어. 종강할 때도 울고, 이사할 때도 울고, 가게가 사라져도 울고… 그래도 이런 것들은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 어느 정도 극복되는데 말이야. 그 상실이 사람과 관계되었다면 사태는 조금 심각해져. 사람은 다른 어떤 것보다 대체가 어려워서. 그리고 내가 무엇보다 마음을 많이 쓰는 존재라서.
상실에 관해 오래 힘들어했던 기억들이 촘촘해. 그래서 ‘이별을 모르는 사람처럼’ 사람들을 대하는 내가 바보 같았어. 매번 힘들어하면서 왜 영원을 믿는지.
그래서 한때는 관계는 영원하지 않다는 걸 잊지 말자고, 정신 똑바로 차리자고 생각하며 지냈었지. 그러니까 누군가 떠나도, 무언가 사라져도 일상에 아무런 균열이 생기지 않았어. 그게 신기하고 편하고 안전하게 느껴졌는데 공허함이 컸지.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저 시를 만났던 것 같아. 이별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라고 말하는 시를. 그것이 다정으로 사는 일이라고 말하는 시를.
저 시를 안 후로는 어떤 상실을 겪을 때 그 상실이 단지 영원의 실패로만 읽히지 않았어. 영원을 믿는 마음으로만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나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감사하게 되었던 것 같아.
그런데 요즘은 잊었던 문장이 떠올랐고, 그 이유가 내가 이 문장과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했었지? 맞아. 요즘 나는 저 문장과 아주 먼 마음을 가지고 지냈었어. 지금 한창 좋은데 오지도 않은 끝을 두려워하며 ‘박수칠 때 떠나는 게 낫지 않나?’라며 사람들과 멀어지고 싶었거든.
지난겨울, 동네 사람들과 함께하는 독서모임을 시작했어. 평소의 나처럼 자연스럽게도 끝을 생각하지 않았고, 모임은 ‘언제까지’를 정해두지 않은, 기한 없는 모임이 되었지. 모임이 그저 재미있고 좋기만 했는데, 모임과 모임 사람들을 좋아하게 될수록, 문득 이 모임의 끝을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느껴졌어.
'끝을 정해두진 않았지만, 모두가 평생 한 동네에서 지내지 않을 테니 한두 명씩 나가다가 언젠가 모임이 끝나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슬퍼져서 그걸 다 보고 있느니 내가 제일 먼저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했어. 심정은 이해되지만 바보 같은 결론이지. 다행히 모임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전하기 전에, 그런 이유라면 모임을 나가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다시 내렸어. 그래도 끝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을 했던 탓에 두려움이 마음에 남아있었지.
그때, 저 문장이 떠오른 거야. 책상 한구석에 꽂혀있던 시집에서 저 문장이 속한 시의 전문을 여러 번 읽어보았어. 읽을 때마다 누군가 내어준 등에 가만히 기대는 기분이 들었어.
이별을 알지만 이별을 모르는 사람처럼. 그러다 정말 이별을 잊은 사람처럼 살고 싶어. 그럴 때 사랑이 자연스러울 테니, 다정이 내 안에 부족함 없이 있어 줄 테니 말이야. 이 편지를 쓰며 저 문장에 대해 계속 생각했더니, 저 문장을 몸에 새기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드는데 말이야. 이야기했듯이 저 문장과 내 삶이 일치될수록 저 문장은 잊힐 테니 그러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몸이 아니라 내 삶에 자연스럽게 저 문장이 새겨졌으면 좋겠어.
결아, 오늘 내가 네게 전한 문장이 네게는 어떻게 다가오는지 궁금해. 하지만 이 질문을 하지는 않을래. 너무 좋아하는 책을 독서모임에 가져가지 않는 이유는 그 책을 향한 모든 말이 내게 너무 밭게 다가오기 때문인데 이 문장도 그런 것 같아. 그래서 오늘은 내 문장에 대해 묻는 대신 네 문장에 대해 질문하고 싶어. 네게도 언젠가 몸에 새기고 싶었을 만큼(혹은 실제로 새긴!) 문장이 있는지 궁금해, 그 문장이 네게 어떻게 그런 문장이 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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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축제들이 몇 년 간의 공백기를 끝내고 다시 개최되는 걸 바라보면서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요즘이야. 곧 단풍이 들면 산마다 나무보다 더 빼곡히 사람들이 들어차겠지. 모쪼록 평안한 가을 보내길 바라며, 또 편지할게.
2022.10.09. 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