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이 편지가 네게 보내는 서른 번째 편지라니. 조금 믿기지 않아. 서른 번의 월요일을 지내며 너와 나눈 질문과 일상, 그리고 계절이 편지의 형태로 남아있다는 게 든든해. 허무와 싸우는 게 나의 과제 중 하나였는데 이 편지를 쓰며 과거를 과거에 두어도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어 좋았어. 어제의 마음들을 편지에 안전하게 담아두고 내일의 마음으로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었어. 네게는 서른 통의 편지들이 무엇으로 남았을지 궁금해.
이번 주는 조금 숨 가쁘게 보냈어. 세 가지 큰 자극이 있었거든. 표면적으로 보면 다 나쁜 일인데, ‘좋기만 한 일도 없고, 나쁘기만 한 일도 없다’는 말을 되뇌면서 그 일들을 단지 상처만으로 두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 그 일들은 각각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에 일어났는데 금요일 해가 질 무렵에는 그 일들이 나를 괴롭게 하지 않았어. 무서운 소화력인걸! 하며 스스로를 조금 대견해했지. 물론 혼자만의 힘으로 그렇게 빠른 회복을 이뤄낸 것이 아님을 알아, 이곳저곳에서 에너지를 주었지. 그래도 그 에너지를 알아차리고, 수용하고, 또 어떻게 쓸지 정하여 실행한 건 나니까, 나에게 잘했고,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어.
화요일에는 전해졌다고 생각했던 진심이 전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그 사람이 나에 대한 마음을 닫아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어. 내 마음을 오해한 그 사람이 밉고, 용기를 내서 마음을 전한 내가 바보 같고, 또 그 사람과 이미 나눈 좋은 기억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했지. 그 사람과의 관계를 없었던 것처럼 여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기엔 그 사람이 한 시기에 내게 주었던 위로가 너무 강하고 따듯해서 그럴 수는 없었어. 그래서 지금의 상처 때문에 그때의 기억들을 왜곡하는 것을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로 했어. 그때는 좋았고, 하지만 지금의 진심은 전해지지 않았고, 그 사람은 그에 대해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는 걸. 비록 마음은 그쳤지만, 함께 만든 이야기들이 다정했고 아직도 내게 유효하다고, 고맙다고. 닿지 않을 마음을 혼자 정리해보았어. 그러니까 그 일로 더 이상 아프지 않았어.
목요일에는 갑자기 무리한 업무를 배정받고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딜지 고민하며 하루를 시작했어. 구체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그 일은 귀엽게 말하면 민망하고, 나쁘게 말하면 자존감을 갉아먹는 일이라 ‘이 일을 하는 나’라는 자의식을 지우고 일하는 행위 그 자체에만 집중했어. 그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다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대체 오늘 무슨 일은 한 건지 자각하는 시간을 가졌어. 그 일 자체도 힘겨웠지만, 더 힘들었던 건 그 일을 하면서 내가 가진 부끄러운 마음과 스스로를 방치한 시간을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었어. 그게 괴로웠는데, 그래도 이제 그걸 알게 되었으니 더 나아질 일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감사일기를 썼어.
불안에 자주 압도당하는 나라서 항상 부정적인 단서들에 신경을 곤두세우곤 해. 그래서 긍정적인 정서들을 쉬이 느끼면서도 모두 휘발시키곤 했는데, 그것들을 붙잡아 마음껏 누리기에 감사일기가 큰 도움이 되어주고 있어. 그날은 큰 자극이 되는 일을 겪으며 꽁꽁 막아두었던 마음을 다시 마주한 것에 대한 감사와, 그 일을 함께 겪은 사람들에 대한 감사, 그리고 나에 대한 감사로 일기장을 채웠어. 그날 쓴 일기의 일부를 여기에도 짤막하게 남길게.
'오늘은 책상을 벗어나 많은 사람을 대했어.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나를 발견했어. 그래서 그간 내가 스스로를 더 옥죄었구나 알게되어 감사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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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 있었던 일은 비밀이야. 지금은 그 비밀이 있지만, 우리가 계속 편지한다면 언젠가 그 비밀은 사라질 거야. 무척 강렬한 일이었기에 언젠가는 네게 말하게 될 테니.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의 일이 내 안에서 잘 소화되었구나 생각할 수 있었던 건, 금요일 오후 다섯 시 삼십팔 분에 걸려 온 한 친구의 전화 덕분이었어. 사실 그 일들을 겪은 날마다 그 친구에게 전화하고 싶었거든. 그런데 친구가 시험을 치르는 중이라 전화를 걸지 못했었지. 그래서 휴대폰에 동그랗게 뜬 친구 이름에 마음이 단숨에 생글생글해졌어. (웃음)
친구가 그간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말하고 ‘너는 별일 없었어?'라고 물어왔어. ‘나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하고 엉엉 울어버릴 줄 알았는데 마음이 차분했어. 친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일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그리고 그 일들에 어떤 서사를 부여해 기억의 차원으로 보냈는지를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말했어. 하위 발성으로만 하던 생각들을 육성으로 뱉으니 모든 게 더 선명해지는 기분이었어. 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생김으로써, 모든 것이 비로소 완전히 마무리되는 기분이 들었어. 마음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 준 친구에게 고마웠어.
그 통화는 처음 가보는 동네, 어느 도서관 앞 벤치에서 했어. 눈앞에는 마을버스와 동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삼거리와 해 질 녘 다양한 빛을 품은 하늘이 있었어. 삼거리 한 모퉁이에 있는 나들가게, 그 한구석에서는 초저녁부터 동네 할아버지들의 술자리가 한창이었는데, 하얀 형광등 빛이 그 풍경을 저무는 주변 속에서도 시들지 않게 환히 밝혀 주었어. 평소 형광등 불빛이라면 치를 떨지만, 그때 그 불빛은 마냥 좋았어. 노을과 그 술자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통화를 했어. 처음 보았지만 익숙했고, 찰나였지만 그 장면들이 지금까지 길게 길게 되풀이되고 있어. 이 편지에 그 풍경을 담아두고 이제 나는 내일의 풍경을 만나러 가보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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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오늘은 질문 대신 네가 쓴 감사일기를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 굳이 질문으로 바꾼다면 ‘너는 어떤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니?’라는 물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네가 어떤 것들을 통해 마음이 밝은 쪽으로 향하게 되는지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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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람이 찬 날들이야. 여름옷들과 이제는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 오래 옷장에 넣어 둔 두터운 옷들을 꺼내 보았어. 헌 냄새가 날 줄 알았는데 아무 향도 나지 않아 조금 놀랐어. 옷들을 정리하며 이 옷들을 입고 보낼 날들을 가만히 기대해보았어. 동지로 향하는 날들에도 늘 그랬듯 편지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