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하는 사람보다 참여하는 사람이 그것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온몸으로 참여할 수 없다. 혹은 온몸으로 참여하면 더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을 속속들이 싫어하고 낱낱이 사랑하게 된다."(아무튼 피아노 p.13 中)
안녕 결, 민경이야.
오늘 편지는 최근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속을 끓이며 읽은 <아무튼 피아노>라는 책의 한 구절로 시작해보았어.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인 김겨울 님이 왜 유명한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어. 김겨울 님은 북튜버(책에 대한 콘텐츠를 제작하는 유튜버)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영상 몇 개만 보아도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인지, 사유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었지. 책에서는 기대했던 대로 깊은 사유로 빚어진 문장들을 만날 수 있었어. 그리고 작가가 자기 삶을 해석하고,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걸 보면서 많이 닮고 싶다고 생각했어.
저 문장으로 편지를 연 이유는, 최근 내게도 참여하여 낱낱이 알고 싶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야.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고 말했었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본 영화들 모두가 다큐멘터리였어. 세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내리 보면서 자연스럽게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 그리고 얼마 전, 찍고 싶은 무언가가 생겼어.
나는 사람들이 가진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 한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드는 고유한 이야기들을.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궁금해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나는 거기서부터 사랑이 시작된다고 믿고 있거든. 그리고 내가 항상 바라는 건 사랑의 부흥이니까.
인터뷰를 하고, 그 말들을 엮은 책을 펴내고, 이렇게 마음을 묻는 편지를 쓰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는 모두 일종의 ‘사랑 부흥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면 그 역시 결을 같이 하겠지.
내가 영상으로 담아내고 싶은 첫 번째 이야기는 ‘유년’에 대한 것이야.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기에 대해 나는 종종 생각하곤 해. 분명 시간은 연속적인데 왜 그 시기에 대해 단절감을 느끼는지, 그곳에 두고 온 것은 없는지, 만약 있다면 그것은 영영 찾을 수 없는 것인지,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그 시기의 것이 있는지.
깨지기 쉽고, 더럽혀지거나 곧잘 오염되는 것으로 대상화되지만 그럼에도 아득한 빛으로 기억되는 한 시절. 그 시절은 가끔 내가 통과한 한 시기라기보다는 물성을 가진 한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해. 금방이라도 거꾸로 달려가 껴안을 수 있을 것 같고, 화해하거나 배신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모든 유약함의 상징이지만 부서지지 않는 단단함이 그 존재에게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더 궁금하고 두려운.
유년의 경험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고 주장한 유명한 심리학자가 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 편이야. 하지만 그곳이 출발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지점을 탐구해 보는 것에는 긍정적이지.
다큐멘터리를 위해 네 명의 인터뷰이와 한 명의 인터뷰어를 섭외할 계획이야. 각 인터뷰이와의 첫 번째 인터뷰는 현재 그가 거주하는 곳에서 따듯한 것을 먹으며 하고 싶어. 그 인터뷰에서는 유년에 대한 질문 몇 가지를 나눈 후, 기억을 복기하여 유년 시절 살았던 동네의 지도를 그려보는 시간을 가질 거야. 그리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 인터뷰는 그 동네를 걸으며 진행하고 싶어. 함께 한 끼의 끼니를 챙겨 먹고, 해가 뜨는 모습이나 지는 모습을 함께 보고 싶어.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니? (웃음)
*
지난 주말에 제사를 지내러 고향에 갔었는데, 동네 친구와 시간이 맞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어. 둘 다 집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집 근처에서 노니까 지치지도 않고 말이 계속 나왔어. 카페에서 나와서도 동네를 빙글빙글 돌면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러다 친구가 말했어.
- 야, 저기 너 예전 집 있는 골목 아니야?
친구가 말한 집은 내가 대학생 때 살았던 주택이었어. 그 말을 듣고 눈알을 도로록 굴려 주변을 살폈지만, 눈앞의 가게들과 길들은 낯설기만 했어. 내가 계속 혼란스러워하자 친구가 그 집을 보러 가자고 했지. 우리 집 대문 색깔까지 기억하고 있던 친구 덕에 쉽게 그 집을 찾을 수 있었어. 그 집 앞에 서니 그 집에서 쌓은 기억들이 일순간 와르르 눈앞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어. 그 느낌에 압도되어 말들이 멎고, 입에서는 짧은 감탄사만이 맴돌았지. 그 느낌이 좋았지만, 친구 옆에서 나만의 감정에 빠지는 건 실례니까 다시 발걸음을 옮겼어. 그리고는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아. 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밤 산책이 즐거워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친구는 그럼 같은 동네에 있는 첫 번째 집에도 가보자고 했지. 그곳은 내가 태어나 고등학생 때까지 지낸 집으로, 친구와도 그 집에 살 때 만났어.
나무 문을 떼어내고 말끔하게 철문을 단 옛집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어. 무화과나무와 석류나무는 사라졌지만 감나무는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지. 담장의 색도 그대로였어. 대문이 이렇게 작았나? 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낮게 종알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어. 우리는 급하게 골목으로 뛰어들어갔어. 왠지 지금 그곳에 사는 사람의 얼굴을 보아선 안 될 것 같았거든. 뛰어든 골목 끝에는 친구의 옛집이 있었어. 우리는 어릴 때 그 골목의 양 끝 집에 살며 친해졌었지. 비록 친구의 집터에는 빌라가 세워져 예전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친구 집이 만져질 듯 생생하게 떠올랐어. 덩치가 커진 우리에게는 어릴 때 양껏 내달렸던 골목이 짧아 보였어. 내친김에 우리 집에서 너네 집까지 뛰면 몇 초가 걸리는지 세어보자며 친구가 달리기 시작했어.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유년에 대한 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나요?”
많은 것을 잃거나, 버리거나, 잊었지만 이 친구는 여전히 곁에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나의 첫 번째 친구.
*
결, 네게도 이 질문을 건네고 싶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게 있어?
*
그럼 결아, 우리는 다음 주에 또 만나자.
무탈한 날들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