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고요한 방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사실 ‘고요’는 내 방에게 낯선 단어야.
고요한 방을 견딜 수 없어서, 보통 두 가지 이상의 소리가 방에 흐르도록 두는 편이거든.
가령, 라디오를 틀어둔 채 집안일을 한다거나
드라마를 틀어둔 채 휴대폰을 들여다본다거나
가끔은 노래를 틀어두고 다른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해.
근데 지금 이 방에는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뿐이지.
창밖에서 넘어오는 옆집 빨래 터는 소리, 사람들과 자동차가 길을 오가는 소리,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웃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 방의 것은 아니야.
사실 여러 소리를 자발적으로 흐르게 두면서도, 늘 그게 싫었어.
그게 뇌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소리뿐 아니라 나는 뭐든 동시에 몇 가지를 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어. 그게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낸다기보단 두 가지 일 모두에서 도망치는 거란 걸 알면서도, 라디오를 들으며 작업하는 걸, 드라마를 보며 운동하는 걸, 노래를 들으며 집안일을 하는 걸 멈추기 어려웠어.
내 의지로 일들을 해낸다기보단 두 가지 일 사이에서 튀어 오르는 탁구공이 된 듯 이리저리 치이며 일들을 했어. 자율성과 함께 뇌가 심하게 훼손된다는 자각을 한 채로도 그것을 지속했기에 나에 대한 믿음 또한 흔들렸고, 무력했지.
그 굴레에서 나를 꺼내준 건 놀랍게도, 코로나 격리 기간이었어. 달리 말하면 온전한 의미의 쉼, 죄책감 없는 쉼이었어.
늦잠을 자도, 낮잠을 자도, 온종일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아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어. 이런 마음이 얼마 만인지 세어보다가, 오래도록 내가 쉬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어.
격리 기간 동안 원 없이 쉬면서, 빠르게 오가던 탁구공을 가만히 손에 쥐어보고, 상한 곳은 없는지 들여다보기도 하고, 천천히 굴려보기도 했어.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회복되었어.
반짝 효과일 수도 있지만, 격리가 끝난 후 3일을 지내는 동안 일상의 많은 부분이 회복되었다는 걸 체감했어. 밥을 먹고, 청소하고, 공부하고, 일하고, 책 읽고, 드라마를 보고, 피아노를 치고, 걷고… 일상을 이루는 조각들은 변함없지만, 그것들이 충돌하지 않고 차례로 맞물려 흘러가는 그 느낌이 좋았어.
무엇보다, 늘 안개가 낀 듯 흐릿해서 내내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렸던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어. 안개가 걷힌 그곳은 내 상상과는 달리 그리 위험해 보이지는 않더라고.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랄프 왈도 애머슨)"라는 문구를 본 적이 있어. 한동안 온 세상이 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아. 자율성이 훼손되어 나를 믿을 수 없었고, 확신이나 자신감을 가지기 어려웠거든. 그래서 아무도 나를 공격하려 들지 않는데도 늘 불안했어.
지금도 날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요 며칠간 마주한 나는 되게 믿음직스럽고, 멋있었어. 며칠 잘 쉰 것뿐인데 이런 변화가 생겼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조금 허무하기도 해.
한꺼번에 많은 것을 하는 행동을 고치고 싶어서 나름대로 보상이나 처벌 전략을 사용해본 적이 있었는데 늘 실패하곤 했어. 너무 얕은 차원의 접근이었던 거지. 필요한 건 제대로 된 휴식이었는데 말이지.
이번에는 우연히 내게 진짜 필요한 걸 알게 되었지만, 앞으로는 그것을 잘 탐구하고 찾아내고 싶어. 나랑 친하게 지내면서도 상황에 따라서는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연습을 하려고 해. 하지만 나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을 테니,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에도 익숙해져 보려고 해. 마음 먹은 김에 시도해보려고, 다음 주에 상담 신청을 해놓았어. 여러 방식으로 접근해도 해결이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만 헤매고(헤맨 시간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겠지만) 전문가의 의견을 들을 때인 것 같아. 기대돼!
결, 그래서 오늘은 네게 이 질문을 하고 싶어.
- 지금 너에게 진짜 필요한 게 뭐야?
나에게 온전한 쉼이 필요했듯, 네게 지금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인지 궁금해.
*
격리가 끝나던 밤 12시, 현관에 나란히 정리해둔 쓰레기들을 들고 밖으로 나갔어. 쓰레기를 버리고 잠깐 걸었는데, 그간 올려다보지 못했던 나무들의 잎이 모두 떨어져 있는 걸 보았어. 그게 잠깐 서러웠지, 그래도 새 계절을 반갑게 맞이하고 싶어 마음을 다졌어. 그리고 그다음 날, 업무에 복귀하고, 동료와 화상 미팅을 했어. 미팅 끝에 잡담을 나누다가 어제 나뭇가지 빈 거 보고 너무 슬펐다고, 이번 가을은 못 즐긴 거 같아서 아쉽다고 이야기했지. 그러자 동료가 크게 웃으며 말했어.
“민경 님, 우리 점심 먹고 매일 은행나무, 단풍나무 보면서 산책했잖아요, 이제 가을 그만 보내줘요.”
그 말을 듣고 나도 함께 크게 웃었어. 아무리 그 안에 살아도 아쉬운 계절이라 그 산책들을 모두 까먹었었나 봐.
이제 슬슬 크리스마스 노래들을 듣고 싶은 걸 보니 연말인가 봐.
나에게는 올해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흘러갔어.
일정한 속도로 날들을 보낼 수 있었던 게 나는 이 편지 덕분인 것 같아.
늘 편지의 도착할 곳이 되어주어 고마워.
그럼 다음 주에 또 편지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