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방 안에서도 몸을 웅크리게 되는, 한기가 든 줄도 몰랐다가 더운 샤워기 물을 맞으며 으스스 몸을 떨게 되는 겨울이야. 주홍이나 보랏빛 노을은 찰나지만, 해가 넘어간 후 옅은 군청빛 하늘이 오래 지속되는 겨울이야. 구름이 없고 미세먼지 농도가 좋아서, 달이 밝게 뜨는 밤을 자주 만날 수 있는 겨울이야.
기다리던 겨울을 맞아서 조금 신이 났는지, 겨울이 가득한 문장으로 편지를 시작하고 있어. 한 주 동안 몰라보게 추워진 날들 속에서 평안히 지냈니? 나는 코앞으로 다가온 연말을 생각하며, 연말에 만날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쁘게 지냈어. 또 한 해를 시작하며 세웠던 계획을 돌아보며 이건 했구나, 저건 하려고 했던 것도 까먹었구나 하고 재미있어했고, 내년에는 어떤 날들을 보낼지 생각해 보아야겠구나 하며 조금 들뜨기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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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상담을 받고 왔는데, 선생님께서 MBTI가 뭐냐고 물어오셨어. 나는 중간은 NF 불변이고, E-I와 J-P는 비율이 그리 차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어. 그러니 선생님께서 사람들과 만날 때 에너지가 생기는지, 아니면 혼자 있을 때 그러한지 다시 물으셨어. 나는 3초 정도 뜸을 들이다가, 사람들이랑 있을 때라고 대답했어. 그 대답을 하고 스스로 놀랐는데, 평소에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리곤 덧붙여 말했어. 사실 혼자 있는 시간도 많고, 그 시간을 필요로 하긴 하는데 그때도 마냥 혼자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혼자 있을 때 주로 책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는데, 그때는 혼자 있는 느낌이 아니에요. 드라마를 보는 시간도 많은데 그때는 ‘나’라는 사람도 없는 느낌이고요, 서사에 모든 걸 던지는 기분?”
그리고 샤워할 때 정도만 제정신으로 혼자 있는 것 같은데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이야기했지. 그렇게 말하는 내내 낯설었어. 그리고 지도에 없던 섬을 발견한 사람처럼 재미있어했지.
외부에서 받는 자극에, 특히 사람에 의한 자극에 에너지를 많이 얻지만, 동시에 민감한 기질을 가지고 있어 사회적 상황이 편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내 모습을 정리했어. 그 결론이 조금 씁쓸하기도 했는데(기질 때문에 선호하는 방식으로 마음껏 살지 못하는 거니까), 덕분에 책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던 건 참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책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의 강점은, 먼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다는 거야. 어떤 사람을 만날지, 언제 만날지, 언제까지 만날지 등. 그리고 책으로 엮었다는 건 글이 있었다는 거고, 그 글은 작가가 책상 앞에서 보낸 무수한 시간의 증거니까. 그렇게 공들여 내놓은 마음이라는 점에서 힘을 가진다고 생각해.
장르에 따라서, 책 너머 또는 안의 사람을 만나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시를 읽으며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걸 가장 좋아해. 다른 장르의 책들로도 충분히 작가, 또는 인물들에게 가닿을 수 있지만, 시 장르 특유의 시인과 독대하는 느낌이 정말 좋거든.
소설에는 서사와 인물이, 에세이에는 정형성과 설명이, 희곡에는 무대와 지문이, 인문서에는 이론과 지적 발견 등이 작가와 나 사이에 있는 기분인데, 시는 철저히 화자와 나뿐인 것처럼 느껴져.
시에 서사와 인물, 정형성과 지적 발견, 그런 것들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시인으로 동일시되는 화자의 존재가 그것들에 압도되는 경우는 잘 없는 것 같아서 그렇게 느끼는 것 같아. 하지만 독대한다고 해서 마음이 더 쉽게 보이는 건 아니야.
마음은 저마다 고유해서, 또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방식도 모두 달라서, 같은 언어로 쓰였다 하더라도 번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시가 다른 장르의 글보다 어렵게 여겨지는 이유는 고유한 마음을 널리 쓰이지 않는 표현으로 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번역할 구석이 아주 많고, 번역에 실패할 확률도 압도적으로 높지.
그럼 쉽게 표현하면 되지 않나?라는 물음이 떠오를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우리가 아는 언어로 모든 마음을 깔끔하게 표현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보다 언어에 미처 다 담을 수 없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가끔은 어렵고 모호하고 못 알아먹게 쓰인 마음에 대한 문장들이 더 진실에 가깝게 느껴지는 경우가 내겐 많았어.
대체로 그런 문장들을 시에서 만났고, 그 문장들을 다 이해하지도 못한 채 들여다보는 게 좋았어. 대부분이 오해거나 오독인, 실패하는 독서를 반복했던 이유는 ‘마음은 쉽게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며, 모조리 파악할 수도 없으며, 발화되는 순간마다 온전히 이해될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진다’고 시 속의 문장들이 말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야. 그게 나에게는 위로가 되었어. (물론 너무 오래 읽으면 머리가 아프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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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워 바깥에 나가서 자극받는 일이 줄어서 그런지, 시가 잘 읽히는 날들을 보내고 있어. 그러다 4년 전, 사회 초년생 생활이 너무 어려워,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덜컥 신청했던 수업의 선생님이셨던 시인님의 시집을 꺼내 읽게 되었어.
추웠던 겨울, 일곱 번의 금요일마다 평일 동안 부서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한 시간 반을 달려 노원구의 한 서점에 갔어. 그곳에서 조용히 서로가 쓴 시를 나누고, 몇 마디씩을 덧붙였던 시간이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큼직하고 깊은 흔적으로 남아있어. 흉터가 될 뻔했던 어려운 시간들을 흔적으로 남을 수 있게 다독여주었던 수업이었어.
시인님과 한창 얼굴을 나누던 시기에 발행되었던, 시인님의 친필 서명이 새겨진 시집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았어. 그러다 보니 시인님이 보고 싶었어.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시인님의 새로운 시집을 사두었는데, 그 시집을 이어 읽으니 보고 싶은 마음이 본 것 같은 마음으로 변했어.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날들을 지나오셨구나, 그때 단호하게 내게 말했던 마음들이 변하기도 하셨고, 그때와 다름없는 마음들을 가지고 계시기도 하구나 하며 아무도 없는 방에서 시인님과 마주 앉아 시 이야기를 하던 그때처럼 열렬히 말을 걸고, 말을 들었어. 해가 다 질 때까지 오래 가만히 앉아 그 시집을 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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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그래서 오늘은 네게 시인님의 한 문장을 빌려 질문을 건네고 싶어. 아래 문장이 네게는 어떻게 다가오는지 궁금해. 박소란 시인님의 <울고 싶은 마음>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야.
‘마음은 남은 서랍이 없겠다’
고유한 언어로 쓰인 이 문장이 네 고유한 마음에 어떤 의미로 닿을지 궁금해, 네 감상(感想)을 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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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결, 한 주 동안 편안히 지내길,
동지에 가까워지는 날들 속에서도 늘 몸과 마음을 덥힐 수 있는 온기를 곁에 두길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마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