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지난 한 주는 어떻게 지냈니? 나는 무슨 일이 있었다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고도 말하기 애매한 한 주를 보냈어. 올해 들어 가장 자극이 덜한 날들을 보냈던 것 같아, 기억이 흐릿한 걸 보니 말이야. 그 고요함이 좋아서, 온기가 도는 침대가 몸에 꼭 맞는 옷처럼 편안해서, 연말에 욕심껏 잡아둔 일정들을 떠올리며 종종 심란해하기도 했어. 막상 그날들이 오면 반갑게 맞이하겠지만.
순하고 담백한 두부 같은 날들을 보냈지만, 사실 두 가지 일에 골몰했어. 하나는 피아노 치기이고 다른 하나는 달 사진 찍기야. 부쩍 추워진 날씨에, 저녁 먹고 갈 곳이라곤 피아노 학원이 유일했어. 마침 지난봄부터 연습했던 곡(사랑의 꿈)이 이제 손에 익어서, 알맞은 음을 알맞은 박자 동안 치는 것에만 쓰던 정신력을 다른 곳에도 쓸 수 있게 되었어. 그래서 이제 이미지를 상상해보기도 하고(‘여기는 트와일라잇 결혼식 장면에 나오는 정원을 거니는 느낌으로 쳐보자’ 같은 다짐을 되뇌며 치는 거야), 건반 누르는 속도나 무게 같은 것을 바꿔가며 쳐보기도 해. 얼마간의 여유가 짜릿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늘어서 그런지 신경이 곤두서고 쉽게 절망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어. 그럼에도 이 곡과 점점 더 친해지는 느낌이 좋고, 이 곡을 약속된 악보에서 고유한 연주로 바꿔나가는 게 즐거워. 아무튼 늦은 밤, 피아노 연습실에서 한숨을 후후 뱉으며 매일 같은 곡을 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나일 거야.(웃음)
그리고 달 사진 찍기. 이번 주는 달이 매일 예쁘게 떴어. 그것도 낮달이. 낮달이 저녁달이 되고, 밤달이 될 때까지, 달 쪽으로 걸으며 점점 환해지고 높아지는 달을 좋아하는 동시에 미워하며 올려다보았어. 어느 날은 2022년 마지막 보름달이 뜬다는 소식을 듣고,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가서 달을 보고 왔어. 공원이 트여있으니 잘 보일 거라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겼는데, 조명이 밝아 잘 보이지 않았어. 그래서 주택가를 누비며 어느 어두운 골목에서 선명한 달빛을 보고서야 만족하고 집으로 돌아왔었지. 달에 대한 집착. 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아름다운 것에 대한 집착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 그 마음 때문에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는 것에 서툴러지고 있어서 매번 조급하고 조금 슬퍼. 그래서 이번 주, 달을 올려볼 때마다 이중적인 감정을 가졌던 걸지도 모르겠어.
아름다운 것들에 집착하는 마음에 대해서 쓰고 싶지만, 아직 그것에 대한 생각이 무르익지 않아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대신 오늘은 달 이야기를 할 거야.
마음속에 달의 자리가 생겼던 건, 달이 자신의 빛으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때였어. 저렇게 명백하게 빛나는데 그 광원이 저 존재 안에 있지 않고, 바깥에 있다는 게, 그러니까 그저 태양의 빛을 반사해 빛나고 있다는 게 신기하고, 조금은 공허했어. 달을 확대해 찍은 사진이나, 달 표면을 묘사한 자료들을 보면 달은 투박한 돌덩이처럼 보이지. 빛나는 구석이 없는. 나는 그 단단한 모습도 좋았어.
서랍 정도 되었던 마음속 달의 자리가 방 크기가 되었던 건, 2018년 경이었어. 그 당시 나는 자기애에 대한 회의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어. 막 20대 중반이 되었던 그때, 20대 초반의 시간들을 돌아보았는데, 과거에 내가 했던 치명적인 잘못들이 다 자기애 때문인 것 같았거든. 나 이외의 존재들과 내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어. 그리고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을 이상하게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어 했어. 나의 행복이 다 내 덕인 것 같았고, 내 안의 빛에만 골몰했어.
그때 마음을 바로잡는 데 도움을 주었던 건 그럼에도 곁을 내어준 사람들과 한병철 교수의 책들, 그리고 달의 존재였어.
먼저 사람들. 이러나저러나 곁에 있어 준 사람들. 나의 합리적이지 않은 죄책감을 바로잡아 주고, 내가 내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안으로만 향하는 마음들을 바깥으로 내보낼 수 있도록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들이 있었어.
그리고 한병철 교수의 책들은 매번 호되게 혼나는 기분으로 읽었어. 불쾌할 수도 있을 만큼 주장하는 바가 강하고, 표현 또한 강렬한 책이었는데 그때 나에게는 그런 말들이 필요했던 것 같아. 지금도 책상 앞에 붙여놓은 구절을 너에게도 전하고 싶어. 아래 구절을 되뇌며 나는 타자를 타자로 두는 연습을 했어.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붙잡고 알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닐 것이다”
-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中-
그리고 마지막으로 달. 그때 나는 나를 달에 비추어 보며, 달이 가진 속성이 내게도 있다는 걸 기억하고 이해하고자 했어. 내가 나만의 빛으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달을 생각하며 되새겼어. 그리고 빛나지 않는 모습까지도 모두 나라는 것을.
너무 없어서도, 넘쳐서도 안 되는 자기애는 아직도 내게 어려운 부분이야. 하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후로는 늘 인지하고 바로잡고자 했었기에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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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오늘은 네게 이 질문을 건네고 싶어. 내가 나를 달에 비유하며 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 너도 다른 존재에 너를 비추어 이해해보려 한 적이 있니? 또는 닮고 싶은 어떤 존재를 너의 다른 이름으로 삼았던 적이 있어? 그 존재의 어떤 부분이 너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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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어두고 편지를 썼더니 손끝이 차. 늦은 오후까지 방에 닿던 해도 이제 자취를 감추었고 말이야. 이제 창문을 닫고, 방에 불을 켜고, 잠시 손을 녹인 다음에 저녁을 해 먹으려고 해.
다음 주에 또 편지할게.
그동안 몸 마음 아프지 않게 지내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