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눈 소식이 잦은 한 주를 보냈어. 네가 지내는 곳에도 눈이 왔니?
하늘에서 희고 귀여운 부스러기들이 떨어지는 풍경은 언제 봐도 놀랍지만, 그 풍경이 그치면 마주하게 될 눈길은 늘 두려워. 눈길에서는 다리를 쭉쭉 뻗으며 빠르게 걷기 어려워 평소보다 조금 더 여유를 두고 집에서 나서는 편이야.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간 길, 또는 볕이 잘 들었을 거라고 예상되는 길을 열심히 유추하곤 하지. 눈은 좋지만 눈길은 무섭다니,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심보인가? 싶기도 해. 하지만 눈을 보고 싶다면 눈길은 피할 수 없겠지. 그리고 눈길을 걷는 게 쓰기만 한 경험은 아니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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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라는 이름을 빌려서, 한해를 함께했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어. 한해 끝이면 어김없이 덮쳐오는 '올해 뭐했지..?'라는 질문을 무력화시키는 시간들이야. 올해는 유독 새로운 인연이 많았는데, 눈만 빼꼼 보았던 낯선 얼굴에 갖가지 표정이 머무는 걸 바라보면서 그 얼굴에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아. 마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지. 아주 먼발치에서, 뭉툭한 풍경으로만 보였던 마음이었는데, 하나둘 징검다리가 톡톡 놓여서 조금 가까이 서서 그 풍경의 가려진 부분이나 세부를 목격하기도 했던 것 같아.
낯선 얼굴이 익숙한 얼굴이 되고, 액자 속 풍경화 같았던 마음이 걸어볼 수도 있는 장소가 되는 시간들이었어. 그 시간들이 다디달았지만, 그 후 대가를 치르듯 혀에 닿을 쓴맛들이 두렵기도 했어. 이런 마음 때문이었을까? 연말에 만난, 그리고 만날 사람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문장이 있었어.
“그때는 그 애의 이름이 이안이라는 것을 몰랐다. 처음 만났으니 이름이고 뭐고 이안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다. 훗날 수정은 이 장면을 수 없이 떠올리며 누구와 나눌 수 있는 순간 가운데 가장 소중한 순간이란 바로 이 순간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서로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마주 보는 첫 순간. 아직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은 순간. 각자의 마음속 상처에 관하여 서로가 완전히 무죄인 유일한 순간.”(단명소녀 투쟁기 中)
결, 너는 위 문장에 얼마나 동의하니? 나는 처음 만나는 순간, 서로의 삶이 한 톨도 엉키지 않은 그 무중력 같은 순간이 특별한 순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 뒤의 엉킴과 혼란이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해.
사실 이 편지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연말에 만나고 있는 사람들과 아직 상처를 주고받지 않았는데 그래서 곧 다가올 상처들이 두렵다고, 그럼에도 계속 엉켜있음을 선택할 거라고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생각해보니 이미 그 사람들과 나는 서로에게 완전무결하지는 않은 것 같아. 눈치채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미 잊었기 때문에 지금은 상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아마도 서로에게 한두 번씩은 유죄 선고를 내리지 않았을까 싶어. 그렇지 않다면 그 관계에서 내가 맛 본 단맛이 설명이 안 되니까. 눈을 보기 위해서는 눈길을 감당해야 하는 것처럼, 관계에서 기쁨을 느낄 만큼 누군가와 바투 서 있으려면 그의 중력을 감당해야 하니까.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눈길을 걷는 게, 그러니까 깊이 침투해오는(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아를 향해 도전해오는) 누군가의 중력에 휘말리는 게 쓰기만 한 경험은 아닐 거야.(사실 이 문장을 쓰면 떠오른 장면들이 있는데 쓰긴 써.) 그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 대체로 그것들은 내가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었고, 현실의 범위를 넓혀주었으며, 인지할 수 있는 진실의 개수를 늘려주었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할 수 있겠지만, 내 안에 갇혀 한정된 현실 속에서 나만의 진실을 가지고 사는 건 왠지 외로울 것 같아서, 앞으로도 나는 비슷한 선택을 할 것 같아.
아주 단호하게 말했지만, 사실 누군가 나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면 하늘이 무너지고, 반대의 경우에도 마음이 많이 쓰이지. 그리고 이런 고민을 할 필요 없는, 건네받는 순간 던져버리고 도망가야 하는 종류의 상처들도 있기에 늘 섬세한 판단이 필요해.
하지만 특별한 다짐 없이도, 늘 그랬듯 내년에도 나는 기어이 '각자의 마음속 상처에 관하여 서로가 완전히 무죄인 유일한 순간'을 지나 죄들을 쌓아나갈 것 같아. 그 시간들을 조금이라도 현명히 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여기에 작은 다짐을 남겨두려고 해.
- 상처받았을 때 상처라 말하기, 상처 주었을 때 사과하고 그것을 꼭 기억하기. 너 유죄야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서 무작정 도망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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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어쩌다 보니 이번 편지에서 2023년의 관계에 대한 내 다짐을 너에게 선언한 것 같아. (웃음) 너는 어때? 2023년, 관계에 관해 다짐하고 싶은 게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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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가득 드는 한낮에도, 바람이 불어오면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웅크리게 되는 요즘이야. 한기를 피하긴 어렵겠지만, 틈틈이 몸 덥히며 너무 오래 춥지는 않길 바라.
그럼, 다음 주에 또 편지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