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크리스마스 밤이 깊어지는 걸 바라보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시야가 닿는 곳에 트리 한 그루 없지만, 캐럴 대신 장작불 타는 asmr을 듣고 있지만 크리스마스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게 느껴져. 밤이 지나면, 다시 크리스마스와 가장 먼 날이 시작되겠지.
지난 금요일에는 동지가 지나갔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봄을 떠올렸어. 앞으로 봄, 그리고 여름의 하지까지 밤은 점점 더 짧아지기만 하겠지. 현실적으로는 밤에 범죄가 일어날 확률이 높고, 귀신과 괴물도 밤을 선호하겠지만, 나는 가끔, 아니 자주 밤을 더 안전하게 느껴. 숨을 곳이 많으니까. 얼굴을 내보이지 않을 수 있으니까. 이 말은 즉, 편히 얼굴 내보이는 게 내게 어렵다는 말이지.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게 불편한 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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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에는 4년 동안 이어오고 있는 독서모임 사람들과 연말 모임을 가졌어. 내가 막 서울에 왔을 때 시작했던 모임이라서 내 서울 생활의 역사를 함께하고 있는 모임이고, 내가 많이 좋아하는 모임이야.
늘 그렇듯 그날도 서로를 궁금해하며, 여백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어. 눈앞에는 진한 크림치즈가 뭉텅이로 들어있는 당근 케이크가 있었고, 그 케이크 위에는 산타 모형이 꽂혀 있었어. 향을 진하게 풍기는 딸기는 알이 컸고, 저마다의 취향대로 담아 온 음료 컵들이 보였어. 견고하게 포장된 쿠키와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젤리가 사이좋아 보였어. 볕이 한금 들어오고 있었고, 볕을 등진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여러 결의 색으로 흩어졌어. 볕을 마주한 이들의 얼굴이 눈밭처럼 반짝거렸어. 순간 말소리가 멀어지고 물에 잠긴 사람처럼 귀가 먹먹해졌어. 멀리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내가 나에게 말했어. 너 지금 편해 보여.
아무 표정이나 지어 보일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하지로 가까워지는 날들도 두렵지 않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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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은 김소연 시인의 시집 <i에게>로 진행되었어. 시인이(또는 화자가) '나'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 지켜볼 수 있는 시집이라고 생각했고, 그 모습들을 나에게 비추어 보기도 좋은 시집이라고 생각했어.
각자 어떤 시에서 자신을 찾았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H님이 우리 모임원과 닮은 시를 각각 꼽아왔다고 이야기했지. 다들 와아! 하고 짧은 탄성을 지르며 H님의 마음에 자신이 어떻게 닿았을지 궁금해했어. 나도 긴장되는 마음으로 내 순서를 기다렸지. H님이 내게 건넸던 문장은 이거야.
너는 거기에 없다
너의 운동화가 잘 말라가고 있다
너의 운동화에 발을 넣어본다
-김소연, <누군가> 中-
떠난 누군가를 생각하며,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게(운동화에 발을 넣는 행위를 H님은 이렇게 해석하셨어) 그냥 나 같았다고 H님이 이야기했어.
있지, 그 이야기를 듣는데 마음 한 부분이 관통당한 기분이 들었어. 아주 깊숙한 곳에 오래전부터 있던 마음이 말이야. 단단하게 뭉쳐있던 덩어리가 풀리고, 구멍이 생겨 바람이 들었어. 그 주변으로 여러 기억이 모이는 걸 체감하는 게 즐거웠어. 너무 오래 같이 있어서 거기 있는 줄도 몰랐던 마음이었는데, 다시 마주하니 조금 애틋한 마음도 들더라. 사실 모임이 있기 하루 전에도 느꼈던 마음인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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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하루 전에는 십지기 친구를 만났어. 멋지게 트리를 달아 둔 백화점을 구경하고, 심야 영화를 보았어. 도로에 차가 없어서 20분 거리를 5분 만에 달려 집에 도착했는데, 친구가 그냥 들어가기 아쉽다고 해서 동네 술집에 갔어. 그곳에서 우리는 조금 낯선 대화를 했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열일곱에 만난 그 친구와는 마음의 가장 아래부터 위까지를 모두 공유했었는데, 대체로 웃고 기뻤지만 좋지 않을 때는 가까웠던 만큼 깊이 상처를 주고받곤 했어. 성인이 되고 나서는 모든 마음을 서로 내보였던 그때의 기억을 나누어가지고 비교적 안정적인 날들을 지나왔었는데, 그날 그 술집에서의 대화는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 적나라했고, 또 어떤 의미로는 버거웠어.
자세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친구는 내가 몇 개월 전에 써주었던 편지를 읽고 이제껏 충족되지 않았던 어떤 것이 채워졌다 말했어. 사실 친구가 편지에서 발견한 나의 어떤 마음은 언제나 나에게 있었던 것인데, 친구가 그걸 몰랐다는 게, 아니, 친구가 그걸 모른다는 걸 내가 몰랐다는 게 슬펐어. 그걸 영원히 내가 알아차리지 못해서 그 마음이 내게 있다고 전하지 못했더라면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지. 그래서 깊이 안도했어. 그건 상상이고, 우리의 현실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 행복했어.
- 네가 죽으면 얼마나 슬플까.
어떤 존재로 인해 한없이 기쁜 순간에 내가 습관처럼 하는 생각이야. 그 존재의 부재를 생각하는 거. 아직 마르지도 않은, 어쩌면 여전히 누군가 발을 넣어둔 신발에 발을 비집어 넣고 혼자 슬퍼하는 거, 행복한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동시에 그 마음이 더 깊어지게 하는 거. 나가사키탕에 빠진 버섯인지 해산물인지 모를 물컹한 것을 집어 먹으며, 그 친구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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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에게>로 진행한 독서모임에서 각자 어떤 시에서 자신을 찾았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지? 나는 <다른 이야기>라는 시를 골랐고, 그중에서도 아래 시구를 꼽았어.
'곰을 무서워하면서도 곰인형을 안고 좋아했듯이.'
사람과 관계 맺을 때의 내 모습을 정확히 관통하는 표현이라 깜짝 놀랐던 시구야.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사람이 부재가 전제된 존재라는 게 늘 두려웠어. 그래서 그 대전제를 지우고, 마치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지우고 부드러운 털과 동그란 귀와 코만을 재현한 곰인형처럼,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부드러운 부분들만을 꽉 껴안았어.
그렇게 안전한 곰인형을 안고 있지만, 사실 가장 좋은 순간마다 곰을 떠올려. 부재를 떠올려. 그래도 두른 팔을 거두고 싶지는 않아. 내가 안고 있는 곰인형이 사실 곰이라는 걸 받아들일 용기는 없고, 그저 곰인형이 곰이라는 사실을 주기적으로 잊으면서 지내야 할 것 같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는 곰인형이 아닌 곰을 껴안는 시간이 더 늘어나겠지. 그때 그 마른 신발들에 발을 넣어보는 내 마음은 어떨지, 지금 여기에서 그때의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어. 그 질문이 아주 천천히, 먼 길을 돌고 또 돌아, 느리게 도착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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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혹시 너에게도 곰인형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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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 편지에서는 새해 인사를 건네겠다.
영영 멀어질 2022년을 잘 정리하는 한 주를 보내길 바랄게.
늘 건강하고, 다음 주에 또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