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까만 토끼의 해, 첫 편지를 쓰고 있어.
새해는 고향 집에서 맞이했어. 늘 그렇듯 가요대전과 연기대상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열두 시 오십 팔구분 즈음 보신각을 크게 비추고 있는 뉴스 채널을 틀고, 카운트다운을 했어. 몇 초간 환호하고, 곧이어 이제 자야겠네, 하며 방으로 돌아갔지.
있지, 이번 새해는 도통 실감 나지 않아. 6월부터 다시 작년 나이로 돌아가서일까? 아니면 이제 나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궤도에 올라타서일까.
사실 실감 나지 않다기보단 내키지 않아.
회고도 다짐도 하고 싶지 않았어. 무엇보다 들뜨고 싶지 않았어. 눈을 감는 동시에 잠들고, 잠깐 눈을 감았다 뜬 듯 깨어나는 어느 개운한 아침처럼. 꿈 없는 잠을 이루어낸 사람처럼. 2022년과 2023년의 이음새를 감각하지 못하는 무딘 사람으로 며칠을 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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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집으로 내려가기 전날, 서울 집 청소를 열심히 했어. 내년에 돌아올 내가 기분 좋았으면 해서. 그리고 잠들기 전 책상 앞에 앉아서. ‘올해 혼자인 마지막 순간이야’ 생각하며 글을 썼어.
며칠 전부터, 마음속에서 2022년을 끝내야 할 당위가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어. 왜 그런 소리를 할까, 2022년이 끝나기 전에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 긴 글을 썼어. 그 일부를 너에게도 전하고 싶어.
‘믿을 수 없는 일이 그치지 않고 일어났던 2022년. 현실이 조각조각 찢어져 바람에 날려가는 것 같았다. 아직 조각을 다 맞추지 못했는데 2023년이라니. 하지만 우주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아주 미세한 존재이듯 광활한 시간이란 개념 안에서 2022년과 2023년의 차이란 미미할 것이다. 그러니까 해가 바뀌었다고 2022년을 잊어버릴 생각은 없다. 2022년뿐만 아니다. 내가 태어나 살아온 순간들,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 전 순간들까지. 내가 인지하고 있고, 찾아낼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모두 나의 현실일 것이다.’
사실, 진실, 그리고 현실. 명백히 다르지만 복잡하게 엉켜있는 이 '실' 자 돌림의 단어들을 구분하고 싶다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이제는 나름의 구분법이 생겼지.
다툴 필요 없이 하나의 진실을 공유할 수 있는 건 사실.
어떤 사실도 명백한 사실로 채택될 수 없기에, 각자의 믿음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되는 사실이 진실.
그리고 진실로 이루어진, 각자가 감각하는 주관적인 물리적, 심리적 시공간인 현실.
나는 찾고 싶었던 2022년의 진실들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2023년을 맞이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2022년에 머물고 싶진 않았어. 그래서 현실의 범위를 조금 넓혀보기로 했어. 그러다 알게 되었지. 현실이 연 단위로 끊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 현재만이, 가까운 과거와 미래만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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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통 구분하기 어려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시간들. 그것이 켜켜이 쌓여 작년이 되어버린 2022년. 그래도 내게는 기록이 남았네. 이 편지 말이야. 이 편지가 내게는 시간을 감각하고 또 구분하는 하나의 장치야. 네게는 이 편지가 어떤 의미, 또는 도구일지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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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아, 새해복 많이 받아.
늘 건강하길, 부족하지 않게 웃는 날들을 보내길 바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