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서울에는 비가 내리고 있어. 며칠 동안 미세먼지가 심했는데, 먼지가 비에 다 씻겨 내려갔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 창이 없는 방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 비가 멎었는지 계속 내리는 중인지 모르겠지만, 높아진 습도로 구불거리는 앞머리와 평소만큼 건조하지 않은 실내 공기로 비가 내리는 날의 감각을 유지하고 있어.
비가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은 비 대신 눈이 오기도 했고, 오랫동안 재택근무를 해왔기에 우산을 쓰고 비를 맞을 일도 별로 없었거든. 그래서 이 비가 유난히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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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준비하는 일이 생겼어.
모든 계산은 끝났고, 매일 해야 하는, 주어진 일이 생겼지.
그게 기쁘기도 하고, 벅차기도 해.
벅참은 중립적인 감각일까? 기쁨에 벅차오를 수도 있고, 힘들어 벅찰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무언가 한계를 넘었다는 의미기에, 고요한 수면을 떠오르게 하는 '중립'이라는 단어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그게 기쁨이든 힘듦이든) 자주 벅참을 느끼는 요즘은, 어느 때보다 식사와 요가에 의지하고 있어.
점심을 꼭꼭 씹어 먹고, 저녁도 정해진 시간에 잘 차려 먹으려 하고 있어. 이번 주 저녁 단골 메뉴는 두부 미역국과 무채 볶음이었어. 새우와 멸치로 우려낸 육수에 잘린 미역을 양껏 넣고, 두부에 미묘한 늪빛이 배일 때까지 끓여 먹는 게 즐거웠어. 무는 굵기를 다채롭게 썰고, 뭉근해질 때까지 볶다가 청양고추를 썰어 넣어 매운 향을 입혀 먹었는데, 둘째 날에는 후주를 많이 넣는 바람에 너무 매워졌지만 담백한 맛이 입맛에 맞았어.
그리고 자기 전에 25분 정도 요가 시간을 가지고 있어. 어떤 감정으로 매트 위에 앉아도, 요가를 하다 보면 고요하고 밋밋한 마음이 되어서 잠이 몰려오는 게 좋아.
몸과 마음은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어서 늘 발걸음을 함께 옮기지. 그래서 불안하거나 버거울 때 심호흡을 하고, 근육을 이완하는 훈련을 하면 마음도 어느 정도 진정된다고 해. 그 둘은 두 다리와 같아서, 반대 방향으로 갈 수는 없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요가가 도움이 많이 돼.
그리고 또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독서의 의미야. 원래 내게 독서는 '일'과 '취미' 중 '일'에 더 가까운 것이었어. 정보를 얻고, 읽기를 연습하고, 감정과 사고를 배우는. 하지만 지금 나에게 독서는 '놀이'에 가까운 행위가 된 것 같아. 고등학교 시절, 자습실에서 공부 말고 할 수 있는 게 책 읽기밖에 없었던 때(그마저도 소설책을 읽다 걸리면 혼나기도 했지만) 책을 아지트 삼았던 것처럼. 지금도 준비해야 하는 일 사이 틈틈이, 어떤 날은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며 아주 흠뻑 빠져 책을 읽곤 해. 눈을 반짝이며, 속으로 히히덕거리면서.
공부하듯 읽을 때보다 독서 경험의 물리적인 양은 줄어들었지만, 질은 더 좋아진 것 같아서 만족스러워.(웃음)
이것 말고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생기고 난 후 이전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 것들이 더 있는데, 우다다 쏟아내고 싶기도 하지만, 앞으로의 편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것 같아서 오늘은 줄이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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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너에게도 최근 그 의미가 바뀐 일이 있니? 행위 자체는 바뀌지 않았지만 의미가, 경험이 변한 것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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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동안에는 비가 오고,
네가 편지를 받아볼 월요일에는 기온이 조금 떨어진다고 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날씨 속에서도 늘 건강하길 바랄게.
2023.01.13. 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