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설날의 이른 아침, 편지를 쓰고 있어.
한동안 고향에 갈 때 ktx를 탔었는데, 이번에는 새마을 열차를 예매했어. 꼬박 한 시간이 더 걸리지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 좌석 크기도 넉넉하고, 바깥 풍경 보기에도 적당한 속도고. 여행하는 기분이었어.
열차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눈을 감고 노래를 들었고, 잠깐 졸기도, 책을 읽기도 했어. 그리고 <나의 해방일지> 마지막화도 보았지. <나의 해방일지>는 좋아하는 김지원 배우가 주인공인 작품이라 방영할 때도 관심이 있었어. 그런데 처음 20분을 보는데 마음이 가라앉아서 보기를 그만두었었지.
새해 들어서 매일 한 편씩 그 작품을 보았어. 퇴근하고, 책상 앞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꼭 한 편씩을. 그건 하나의 의식이었는데 말이지, 회사에서의 시간을 무사히 지나온 나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했고, 이제 공부를 해야 하는 나를 달래는 방식이기도 했고, 다른 세계에 몰입함으로써 내 세계에서 잠시 빠져나오는 환기의 시간이기도 했어. 그래서 <나의 해방일지>가 딱이었어.
<나의 해방일지>는 보아온 드라마 중 가장 자연스러운 드라마였어. 서사의 극적임을 줄이는 대신 인물들을 징그러울 정도로 현실적으로 묘사해. 그 집요함이 재미있었어. 드라마의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그리고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점은 마지막화가 마지막화 같지 않았다는 거야.
드라마의 마지막화에는 어딘가 허무한 구석이 있지. 해피엔딩으로 꽉 닫아놓은 결말은 특히 더.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 몰입도 끝나고, 그 드라마는 박물관 유리 안에 보관된 이야기가 되어버려. 그 순간이 늘 섭섭했어. 허무하기도 해서 허겁지겁 자리를 채울 다른 드라마를 찾기도 했지.
그런데 <나의 해방일지>는 적당히 서사를 마무리지으면서도 어떤 단정적인 장면도 보여주지 않았어. 엄밀히 말하면 그다지 해피엔딩도 아니야. 그래서 그 드라마 속 삶이 더 현실 같고, 쭉 이어질 것처럼 느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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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이 드라마라면,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 감독처럼 살아왔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꽉 닫힌 해피엔딩을 원하는 것을 넘어서 매 순간이 행복하길 바랐지. 그리고 그 기대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많은 것들을 계획하고, 조정해왔던 것 같아.
밝은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일에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꼈어.
언젠가, '기대' 또한 통제하고자 하는 마음의 일부라는 글을 본 적이 있어. 기대가 많은 사람이었기에 그 말을 단번에 받아들일 수는 없었어. 기대가 대체 왜 나쁘다는 거야..(글에서 나쁘다고 하지 않았지만, 나는 통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이렇게 느꼈어.)라고 생각하며 기대를 통해 생기는 힘과 생기 같은 것을 떠올렸었지.
그치만 요즘은 기대에 내포된 '통제하고 싶다는 마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있어. 기대가 통제하고 싶은 마음의 일종이라는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특정 사건에 대한 기대는 미래를 통제하고픈 마음일 거고, 특정인에 대한 기대는 그 사람을 통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반영된 것일 수 있겠지.
통제하고픈 마음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질 수는 있다고 생각해. 원하는 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욕망은 삶의 확실한 연료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내가 가진 기대가 '통제하고픈' 마음인지 '당연히 통제되어야 한다는' 마음인지 돌아볼 필요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앨버트 앨리스라는 심리학자에 대해 공부하다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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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앨리스는 '합리적 정서행동 치료'를 고안해 낸 심리학자야. 앨리스는 심리적 문제들의 '인지적'인 측면을 강조했어. 즉, 심리적 불편감은 사건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 때문에 생긴다는 거지. 현실 자체보다는 그 현실에 대한 개인의 해석을 중시한 거야. 그래서 그는 비합리적 신념과 사고를 정신병리의 원인으로 꼽았고, 치료 시 그것을 합리적으로 바꾸어 정서와 행동이 건강히 기능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어.
앨리스가 '비합리적 신념'이라고 꼽은 세 가지가 인상 깊었어.
첫째, 자신에 대한 당위성
둘째, 타인에 대한 당위성
셋째, 세상에 대한 당위성
앨리스가 말하는 '당위적 신념'은 '당연히 ~해야 한다'는 마음을 이야기해. 가령 아래와 같은 신념 말이야.
'나는 당연히 유능한 사람이어야지'
'너는 당연히 나를 인정해 줘야지'
'세상은 당연히 아름답고 밝은 곳이어야지'
어때? 너도 '당연히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니? 나는 공부를 하면서 내 안에 무수히 쌓인 '당연히'로 시작하는 문장들을 목격하게 되었어. 그게 나를 괴롭게 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하지만 한편으론 아무런 기대 없이 사는 건 싫다는 생각이 들었어. 스케치도 안 하고 어떻게 물감을 짜...라는 마음이었지. 그 걱정에 응답이라도 하듯, 앨리스는 이렇게 이야기했어.
"당위적 신념들을 건강한 소망으로 바꾸어야 한다"
'소망'이라는 말이 좋았어. 기대하지만 그것이 당위적인 것은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하는 말.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말라는 말. 그 말이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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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해서든, 너에 대해서든, 세상에 대해서든 당연히 그렇게 될 일은 없다는 거. 통제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거. 다만 기대할 수는 있다는 걸, 그 소망을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는 걸 마음에 새겨두고 싶어.
그럴 수 있다면, 내 기대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때도 쉬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또 일이 기대대로 되지 않을까 두려워 아예 손을 놓아버리는 일도 적어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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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네 마음속에도 '당연히'로 시작되는 문장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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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나 기념일 같은 날에는 '당연히'로 시작하는 문장들이 유독 더 많은 것 같아. 그 문장들 옆에서 네가 괴롭지 않길 바랄게. (이건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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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설도 지났으니 꼼짝없이 2023년이야.
새해 복 많이 받고, 늘 건강하길 소망해.
2023.01.22. 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