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더풀 라이프>에는 지금의 삶을 마무리 짓고,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인물들이 등장해. 이 세계도, 저 세계도 아닌 중간 지점에서 그들은 ‘가장 빛났던 한 순간’에 대한 질문을 받지. 그리고 선택한 그 한 순간을 연극의 형태로 다시금 경험해.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어떤 장면을 꼽아야 할지 고민했어. 죽어도 여한이 없었던 순간을 가져와 미련 없이 이 생을 끝내는 게 좋을지, 해결되지 않았던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 모험을 해볼지, 아니면 그저 편안했던 순간을 고를지.
어떤 장면이 좋을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 무대의 배경은 꼭 노을로 하고 싶어. 어떤 장면이 전경이 되든 노을 앞에서라면 다 아름답다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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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모으는 것만큼 아름다운 장면에 속하는 순간을 쌓아가는 게 즐거워. 사실 돈은 늘 수단이야. 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아름다운 장면을 위해 필요한 물질과 시간을 마련하는 수단. 그래서 이제 돈 공부도 열심히 해보려고.
아름다움이라고 하면 빛과 밀접한 감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빛과 어둠을 포함하고 있는 것 같아. 지금은 어둠을 단순히 ‘빛을 보았으면 감당해야 할 것’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락 같은 어둠도 아름다움의 한 속성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길 바라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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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결, 오늘은 이즈음에서 인사를 건네.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
“‘오늘은’이라고 시작하지 않는 일기를 써보세요.”
더불어 날씨를 문장으로 표현하길 요청하셨어. 맑음, 흐림, 눈 대신 ‘따듯한 바람이 하루종일 불었다’, ‘눈이 밟히는 소리가 잘 들렸다’(본가에 있었으면 그 시절 일기를 꺼내 그대로 옮겨 적었을 텐데.. 지금의 나는 그때 나의 문장을 비슷하게도 살릴 수가 없네..!)
우리가 어떤 전형성에서 벗어나길 바라셔서 그런 규칙을 만드셨던 것 같아. 덕분에 그 시절 일기 속에 담겨 있는 나의 하루들이 어떤 틀에 갇히거나 섣부르게 정리되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 같아.
‘안녕 결, 민경이야’라는 첫 문장은 익숙함과 편안함을 주지만, 어쩌면 어떤 문장들을 흐려지게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오늘은 가장 손을 높게 들고 있는 문장으로 편지를 시작해 보았어. 그리고 그다음 또 가장 잘 보이는 문장으로 그다음도 또… 그렇게 이 편지가 쓰여졌어. 네게 어떻게 닿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듣고 싶어. 네가 어떤 걸 아름답다 여기는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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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입춘. 그리고 오늘은 보름이야. 뭐라도 챙기고 싶어 어제 만난 친구들에게 호두를 나누어주고, 오늘 아침에 남은 호두를 망치로 콱 깨부수어 먹었어. 껍질에서 갓 빼어낸 호두는 왠지 더 고소하게 느껴지더라.
이월은 열두 달 중 발음이 가장 편안한 달이야. 입만 살짝 벌려 말할 수 있는 달.
그 이름에 발맞춰 네가 보낼 올해의 이월도 편하고 어렵지 않았으면 좋겠어.
2023.02.05. 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