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거리가 얼어붙은 것처럼 추웠던 날들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봄 생각을 요즘엔 종종 하곤 해. 이제 또 계절이 바뀌려나 봐.
끼니마다는 어렵더라도 매일 채소를 먹으려 노력하고 있어, 이왕이면 초록빛이 도는 걸로.
오랜만에 시집을 샀어. 허은실 시인의 <회복기>라는 시집이야.
내가 지금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자주 질문하고 있어,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 길을 잃지만.
월초에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멍해지는 게 일상이지만, 이번주는 정도가 좀 심했어. 아마 봄을 앞두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그래서 녹색 채소를 챙겨 먹고, 시집을 읽고, 흩어지는 정신을 눈뭉치 만들듯 꾹꾹 눌러 담으며, 조용히 웅크려 지냈어. 일요일인 오늘이 이번 일주일 중 가장 괜찮은 날이고, 내일은 조금 더 괜찮아지길 바라고 있어.
봄은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계절이야. 마음이 자꾸 바깥으로 도망치려 하거든.
그럼에도 봄을 기다리고 있어. 한강 변의 섬으로, 공원으로 꽃놀이를 가자고 벌써부터 호들갑을 떨고 있고, 봄의 한가운데에 있는 생일에 나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 고민하고 있어.
조용히 웅크려 지내며 나는 조금 두려웠던 것 같아. 점점 기능이 떨어지는 몸과 마음이, 그 둘을 가지고 살아갈 시간이 조금 두려웠어.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해주는 말들 중 ‘점점 더 좋아질 거야’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그래서 조금 울적했는데, 한 날 샤워를 하면서 한 생각 덕에 조금 괜찮아졌어.
앞으로 살아갈 날을 헤아려 보다가, 살아왔던 시간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어.
늘, '아직 00년 밖에 안 살았단 말이야?'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살아온 시간들이 조금 무겁게, 그리고 충분히 두텁게 느껴져. 상대적으로, 살아갈 시간들은 그전보다는 많이 가볍고, 담백하게 느껴지고. 그렇게 생각하니 걱정이 물러나고 조그맣게 용기가 차올랐어. 그렇다면, 살아갈 날이 아득하지 않다면 몸도 마음도 아끼지 않고 살아도 되겠다고. 그리고 그것들의 기능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다가왔지.
영원이 아니라 유한함에 위로받는 느낌이 낯설어.
무언가를 포기하는 마음도 낯설어.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뭘까.
한 주 동안 나를 괴롭혔던 이 질문이 멎었다는 건 내가 어떤 답을 찾았다는 거겠지.
내가 이번 한 주 동안 진짜 원했던 건
온전히 기능하는 몸을 포기하는 것
완벽한 마음을 포기하는 것
희망을 덜어내는 것
영원을 단념하는 것
그런 것들인 것 같아.
그러고 나니, 지킬 수 없는 계획 앞에서 끙끙거렸던 내가 없어지고
조금은 말끔한 얼굴이 되어 기지개를 켜는 나를 만날 수 있었어.
포기의 미덕을 알게 된 한 주였어.
결, 너도 최근에 포기한 것이 있니? 포기하려 고민하고 있는 게 있니?
*
입춘이 지났다지만 아직 공기가 차.
환절기 동안 앓지 않고 보내길 바랄게.
2023.02.12. 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