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이른 오후부터 요가로 땀을 쭉 빼고, 샤워까지 한 후 책상 앞에 앉았어.
날이 좋아서, 방에 햇빛이 넉넉하게 들어와 주어 형광등도 켜지 않고 편지를 써.
조금 전, 함께 모임을 이어오던 분에게 연락이 왔어. 이제 모임에 참여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갑작스럽게 느껴졌지만,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 동안 생각과 마음이 정리되더라.
답장에 아쉽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울음 섞인 이모티콘도 넣지 않았어. 개운하고 날 좋은 지금 오후처럼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싶었어.
그렇게 보낼 땐 좋았는데, 지금은 좀 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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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처음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나는 공간을 다루는 회사에 다니고 있어.
직접 공간을 디자인하고, 짓는 부서 소속은 아니지만, 빈 도화지 같은 도면을 채워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을 옆에 두고 일하고 있어.
지난 금요일에는 자료 조사를 하다가, 부산에 생긴 한 공유하우스에 대해 알게 되었어.
이름은 ‘도란도란 하우스’. 노인을 위한 공공 셰어하우스야.
‘도란도란 하우스’를 소개하는 기사의 제목은 ‘마지막 가족’이었어.
어릴 적에는 대가족이 해체되고 이제 핵가족화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요즘에는 어딜 가나 1인 가구 이야기뿐이야. 1인 가구라고 하면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청년을 떠올리지만, 노년층 1인 가구수도 그에 못지않다고 해.
그리고 고령화, 초고령화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노인 1인 가구수는 더 빨리 늘어날 거라고 해.
많은 사람이 아주 오랜 시간 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이유는 그것이 많은 것을 동시에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겠지.
매슬로우가 제시한 욕구 피라미드에서 1층은 생리적 욕구, 2층은 안전, 3층은 애정과 소속, 4층은 존경, 5층은 자아실현의 단계인데,
‘가족’을 통해서 충족할 수 있는 욕구 범위가 꽤 넓다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은 가족이 해체되고 있지. 그래서 가족이라는 제도에 기대어 충족해 왔던 욕구들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필요가 생겼어.
가족 아닌 사람에게 돌봄 노동을 제공받아야 하며, 가족 아닌 사람들과 애정을 쌓고 소속감을 느껴야 하게 되었지.
앞서 소개한 도란도란 하우스가 공유주택 형태로 만들어지게 된 이유도 노년 1인 가구의 외로움(3층 욕구가 좌절된 것)을 고려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마지막 가족’이라는 표현도 가족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형태의 주거를 제공하고자 하는 의도가 드러났다고 생각하고.
고독은 인간의 실존적 조건이라지만, 고립은 고독과 다르다고 생각해. 나 아닌 존재와 소통하고, 마음을 나누고, 접촉하는 활동 없이 사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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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노년의 내 모습을 생각해 봐.
얼굴은 어떨지, 몸은 어떨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지, 성격은 변했을지, 좀 무뎌졌을지.
그런 건 아무래도 그 시간까지 살아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그때도 나는 여러 모임을 만들고, 또 참가하고 있을 것 같아.
지금처럼 독서모임도 하고 싶고, 소리를 마음껏 낼 수 있는 노래모임도 가고 싶고, 글도 계속 쓰고 싶고, 또 산책하고 꽃 사진을 수집하는 모임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러려면 무엇보다 그때까지 건강해야 할 테니 다음 주부터는 아무래도 요가 난이도를 조금 높여야겠어. (웃음)
결, 너에게도 언젠가 하고 싶은, 또는 지금 당장 하고 싶은 모임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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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도 끝나지 않고, 인터넷 댓글창은 매번 엉망이고, 비관적인 미래 예측들도 지겹고, 그래서 요즘은 자주 무서워하는 것 같아.
미래를, 앞으로 살아갈 시간들을.
현실을 잘 모를 때는, 꼼꼼히 감각하지 않을 때는, 낙관과 희망이 참 쉬웠어.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 것에 익숙해졌지.
그래서 요즘 자주 힘이 빠져.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일이 매일 일어나.
마음속에서 많은 것들이 우글우글거리며 개념을 달리하고, 모양새를 바꾸는 요즘이야.
그게 오랫동안 버거웠는데, 이제는 조금씩 적응해 가는 것 같아.
풀리고 있는 날씨처럼. 지금 마음속에 들어찬 감정들도 조금씩 긴장을 풀고, 원하는 방식으로 바깥으로 나아가길 바라고 있어.
어떤 마음을 마주하더라도, 만나서 반갑다는 말을 첫인사로 건네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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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평안하길 바라며, 2023.02.26. 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