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이번 봄이 시작될 즈음, 일찍이 벚꽃 개화 시기들을 확인해 두었는데, 예측보다 훨씬 빨리 꽃이 피었어.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했어. 이제 삼월에 벚꽃이 피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겠어. 대학 다닐 때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는 말을 듣고 재밌다며 크게 웃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 그 농담도 옛말이 되겠다.
꽃이 이르게, 그리고 모두 한 번에 피어나니 봄이 더 짧게 느껴지는 것 같아. 이제 초입이지만 벌써 그리운 느낌이야. 하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봄을 보내고 싶어. 너는 이 봄을 어떻게 보내고 싶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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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래 못 보았던 친한 언니랑 저녁 시간을 보냈어. 너무 오랜만이라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표정은 어떻게 해야 하나, 조금 이르게 도착한 식당에서 언니를 기다리면서 고민했어. 하지만 늘 그렇듯 언니가 내 앞에 앉으니 그런 고민은 싹 지워지고, 못했던 이야기를 풀어내고 앞에 놓인 맛있는 것들에 감탄하다 보니 네 시간이 훌쩍 흘렀어.
언니랑 시간을 보내며, '아 언니도 참 사람 좋아하네'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기쁘게 안심했어. 나는 가끔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나를 보면서 걱정스러운 한편(사람들 없으면 어떻게 살래!) 한심하기도 했었는데(내 행복은 왜 이렇게 의존적인가..), '나는 사람 좋아하니까'라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언니를 보면서 그래도 괜찮겠구나, 지금처럼 사람을 좋아해도 괜찮겠구나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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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시간이 무겁게 느껴져. 얼추 정답을 찾았다 생각했던 것들도 다 오답처럼 보이고, 견디기 힘든 감정들이 찾아오기도 해. 자라나는 중일까, 낙관해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종종 외로워지곤 하는 요즘이 참 어렵네.
평정을 잃으니 몸과 마음이 싸울 준비를 시작했어. 싸울 적이 누군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매일 비장해졌지. 비장하다는 건 긴장하고 있다는 건데, 긴장 상태가 계속되니 몸과 마음에 쥐가 나듯 감각들이 흐려졌어. 그래서 긴장을 좀 풀어야겠구나 싶었지. 마침 친구가 추천해 준 다큐멘터리가 도움이 되었어.
그 다큐멘터리는 우주를 큰 주제로 하고 있는데, 1편은 다중우주에 관한 것이었어. 다큐에서는 다중우주를 말하기 전에 지구의 주소부터 알아보자며, 태양계가 우주의 얼마나 작은 부분인지, 그중 지구는 얼마나 눈곱만한지 알려주었어. 그곳에서 인간 1로 살고 있는 내가 우주의 먼지라는 게 실감 났지. 그런 생각을 하니 긴장이 조금 풀렸어.
'우주의 먼지'라는 말처럼, 누군가 나의 티끌만 한 존재감을 일깨워주는 류의 말을 하면 '왜 그렇게 생각해야 하지?' 하고 삐뚤게 보았었는데, 시간이 흘러 흘러 이제 그 생각이 내게 필요하게 되었네.
마찬가지로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이라는 마음가짐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 말도 이제는 좋아.
후후 숨을 내뱉으며 몸의 긴장도 함께 풀어보려고 해.
결, 너도 혹시 요즘 긴장하며 지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쉽지 않은 날들이지만, 뭉친 근육을 풀어주듯 마음도 종종 내려놓으며 지낼 수 있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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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는 너에게 보내는 쉰두 번째 편지야. 그건 우리가 편지한 지 1년이 되었다는 말이고, 그러니까 사계절이 지나는 걸 함께 보았다는 것이지. 이 편지를 쓰기 전에 그간 보냈던 편지들을 훑어보았는데 종알종알 말이 참 많았더라. 전하고 싶은 마음이 참 많기도 했구나 싶었어. 1년 동안 편지를 받으며 너는 어땠는지 궁금해.
그리고 한 가지, 조금 갑작스러울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하려고 해.
완연한 봄이 지나갈 동안 잠시, 우리의 편지에 쉼표를 찍어보려 해.
세상이 조금 더 푸릇하고 선명해질 늦봄에 다시 편지할게.
편지하지 않는 동안도 몸 마음 건강히, 편하게 지내길 바라.
나도 잘 지낼게.
그럼 결, 우리 늦봄에 다시 만나
2023.03.25. 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