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밤 산책하기 좋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어. 나는 주로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는데, 그 공원에 가려면 8차선 도로를 지나가야 해서 늘 아쉬웠어. 담배 피우는 사람 곁을 숨참고 지나치듯, 8차선 도로가 끝나고 공원의 입구가 나올 때까지 바짝 긴장하곤 했거든. 그런데 최근에 샛길을 찾았어. 오토바이가 많이 다니긴 하지만 적당히 어둡고 또 조용한 골목길이야.
너도 종종 밤 산책을 나서는지, 목적지는 어디인지 궁금해.
며칠 전에 그 골목에서 한 가족을 만났어.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어릴 때는 자주 업어 줬는데…’라며 고개를 푹 숙여 보이고 있었고, 술에 조금 취한 듯한 아빠는 ‘00이가 다리가 길어져서 팔로 다 감쌀 수가 없다’며 아이를 열심히 달래고 있었어. 멍하게 걷다 그 대화를 듣고는 ‘팔로 감싸는 건 허벅지 아닌가…’ 속으로 되뇌다 작게 웃음이 터졌어. 괜히 팩트를 따져보는 나도 웃기고, 서운함을 토로하는 아이도, 업어주진 못하지만 어떻게든 아이를 달래 보려는 아빠도 귀여워서. 그날 또 어떤 사람들을 봤을까, 잘 기억나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귀여운 사람들이었을 거야.
가끔은 참 당연한 걸 까먹곤 해, 종종 아주 오랫동안 그걸 까먹었다는 사실 또한 까먹곤 하지.
요즘은 오래 까먹고 있었던 어떤 한 가지 행동을 연습하고 있어. 오늘은 그것에 대해 너에게 말하고 싶어.
고등학생 때는 친구들이랑 참 자주 싸웠어. 기숙사에서, 교실에서, 독서실에서, 운동장에서. 양말이 서로 자기 거라고, 이불 좀 개고 다니라고, 왜 서운하게 만드냐고, 왜 그런 말을 하냐고, 왜 나를 그렇게 대하냐고, 나랑 이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거냐고.
아직 열여섯, 열일곱 해밖에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하루종일 붙어있어서 그랬을까,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감정을 내보이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던 것 같아, 그리고 누군가 내보인 감정을 목격하는 것도 두렵지 않았어.
그 시기를 지나서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나는 감정을 말하지 않는 연습을 해왔던 것 같아. 왜냐하면 이제는 감정에 대해 밤새도록 이야기하며 싸울 시간이 없고, 긍정적인 마음들만 주고받기에도 마음이 벅차고, 무엇보다 두려웠으니까. 사소하게 보이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우리 관계를 망칠까 봐, 그래서 누군가를 잃을까 봐. 나를 향하던 마음들이 철회될까 봐.
이런 행동 방식을 택하고 사는 동안에 종종 잡음이 생겼지만 모른 척, 대수롭지 않은 척 넘겼던 것 같아.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관계가 사라지는 게 무서웠고, 그래서 부정적인 마음들을 숨겼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 알게 되었지. 방식만 다를 뿐, 부정적인 마음을 숨기는 것 또한 관계를 잃는 길이라는 걸 말이야. 오히려 더 높은 확률로.
해소되지 않은 마음이 독처럼 쌓이고, 또 부정적인 마음들을 억누르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마음들도 함께 힘을 잃었어. 조용히 서서히 사라지는 마음을 바라보는 게 슬펐고, 영문도 모른 채 변한 나를 마주한 상대에게도 미안했지.
그래서 요즘에는 쓰지 않았던 말들을 입에 올리고 있어.
- 서운해, 싫어, 기분 나빠, 화나
사실 너무 어려워, 내가 감정을 느끼는 존재라는 게 조금 싫어질 정도로.
어제도 친구에게 서운한 마음이 드는 일이 있었어. 한창 짜장을 만들던 중이었는데, 탕탕 당근을 썰던 칼을 내려놓고 침대에 가서 앉았지. ‘위기다!’하며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렸어. 예전이라면 ‘그럴 수 있지’하고 쉬이 넘겼겠지만, 이제는 말하기로 다짐했으니, 복잡해진 거지. 일단 ‘왜 이런 걸로 서운해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내 안의 나를 진정시키고, 친구에게 어떻게 마음을 전할지 고민했어. 어떤 점이 서운한 건지, 그래서 내가 바라는 건 뭔지.
설거지까지를 끝내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어.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차분히 마음을 전하고, 친구의 말을 들었어. 서운했다는 마음을 전하는 게 내 유일한 목적이었기에 사실 친구에게 어떤 말을 듣더라도 상관없었는데, 친구의 말을 듣는데 날뛰던 마음이 잔잔해지고, 편안해졌어. 친구는 당연히 서운한 일이라고, 미안하다고 말하며 내가 내 감정을 밀어내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
전화를 하는 동안 세 번 정도 눈물을 뚝뚝 떨구었는데, 그 눈물을 의미는 모두 달랐어. 처음에는 두려워서, 친구의 말을 듣고는 안도해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뿌듯해서.
앞으로는 이런 일이 더 자주 생기겠지. 아직 부정적인 마음을 고백하는 데에 큰 용기가 필요하고 또 방식 또한 서툴지만, 점점 더 나아질 거라고 확신해. 내가 다짐했고, 또 기꺼이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내 곁의 사람들이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한다는 거야. 너와의 관계에서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든, 그게 설사 부정적인 감정이라 하더라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굳건하다고,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아서 이 고백을 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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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너에게도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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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이 모두 지고, 장미가 한창인 요즘이야.
그리고 절에 많이 심겨있는 불두화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절 나들이를 가볼 참인데 혹시 불두화가 피어있으면 찍어둘게.
그럼 결, 다음 주에 또 편지할게.
2023.05.21. 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