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지난 수요일 새벽, 혹시 어디에 있었니?
나는 내 방 침대 위였는데, 더위에 잠깐 깨었다 막 선잠에 든 참이었지. 선풍기 바람이 솔솔 불고, 기상 시간은 넉넉하고. 꾸던 꿈을 이어 꾸려던 평화로운 찰나였는데, 갑자기 오래된 호루라기 소리 같은 거친 경보음이 방을 채웠어.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어.
- 오늘 6시 32분 서울 지역에 경계 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보, 대피, 어린이와 노약자 우선. 문자를 두 번 읽지도 않고 이 단어를 되뇌며 가방을 쌌어. 현금과 커피믹스, 우드카빙용 칼과 건조대에 널려있던 속옷을 아무렇게나 집어넣었어.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현관문을 열었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바깥을 보는데 하늘이 맑았어. 무작정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어. 거리가 너무 차분해서 이상했지만, 그 차분함에 안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뉴스는 계속 업데이트되지 않고, 나는 역의 가장 아래층에 도착했어. 서울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죽어도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았어. 가족이 있는 곳에서, 최대한 그곳에 가까운 곳에서.
지하철이 강을 건널 때쯤이었나.
- 서울특별시에서 발령한 경계경보는 오발령 사항임을 알려드림
만원 지하철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어. 짧은 순간, 세월호가 떠올랐고 계속 가던 길을 가기로 했어.
서울역에 도착해서는 기사들을 확인했고,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어.
아빠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알렸더니, 잘했다는 말과 함께 이왕 역에 온 김에 대구에 오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들었지.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아. 그대로 열차에 올라타 2시간을 달려 대구에 도착했어.
열차에서는 서울에 사는 친구들과 연락하며 이 해프닝에 대해 농담을 나눴어.
- 민경ㅋㅋㅋ내가 본 사람들 중에 제일 빠르다ㅋㅋ
라는 말을
- 후..아침부터 그냥 지옥철 체험한 백수됐어ㅋㅋ
라는 농담으로 받아치면서 킥킥 웃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일이 해프닝이 되었다는 것에 깊이 안도했어. 긴장이 풀리니 울 것 같은 기분이 되기도 했었지.
대구에서 엄마 아빠랑 밥을 먹고, 산책을 나가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수요일 새벽의 기분과 멀어지려고 노력했어. 그런데 한편으론 그 새벽의 기분을 흐려지지 않게 붙잡고 싶기도 했어.
틈만 나면 그 순간을 복기시켰어.
짐을 싸던 짧은 순간, 가장 강렬했던 감정은 두려움도, 슬픔도 아닌 허무였어.
'내가 좋아했던 것들이 이렇게 다 사라지는구나'하는 허무.
의미 두었던 모든 것이 일순간 살아질 거라는 예감은 뇌의 동작을 둔화시켰어.
진공 같았어.
나의 정신을 붙잡아주던 의미들이 모두 사라져 정신이 모양을 잃고 흩어지는 기분.
그 순간에는 말 그대로 정신적 진공을 경험했기에 생각이 더 뻗어나가지 못했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이때를 떠올리니 궁금해졌어.
'무의미'가 본질이 아닌지.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모든 의미가 소멸된 어떤 상태를 상상했던 거지만, 사실 어떤 상황이든 무의미가 본질이 아닌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실존적 존재로 살고 있는데 무의미(본질) 뭐 어쩌라고,라는 발끈으로 생각을 정리했지.(웃음)
다만, 이번 일을 겪으며 내가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어.
주마등이 지나갔던 건 아니지만, 내 정신의 모양을 결정짓는 여러 의미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었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모두 사라지겠다'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시한 시간을 보내는 것
틀림없이 찾아오는 계절들
아름다운 글들, 그림들, 노래들
나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는 순간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
자주 허무해지고 또 불만족스러워지는 요즘이었는데, 사실 필요한 걸 내가 모두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
*
결, 너는 어떤 것들에 의미를 두며 살아가고 있니?
*
요즘은 틀림없이 찾아온 여름을 반가워하며 지내고 있어. 직사광선 아래에 서 있거나, 습도가 물속에 가깝게 치솟을 때면 눈앞이 아득해지기도 하지만, 울창한 나무 그늘에 서 있을 때면 마냥 기쁘고 반가운 마음이야.
여름의 기쁨들을 수집하며 보내는 한 주가 되길 바랄게.
2023.06.04. 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