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오늘은 아침 피아노 연습을 다녀왔어.
8시 59분에 일어났는데, 연습실에 도착하니 9시 15분이었어.
정신도, 몸도 아직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어.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악보를 오독했어.
버벅버벅 음들이 위태롭게 이어졌지만, 그게 나쁘게 들리지 않았어.
신기하게도. 같은 건반, 같은 손가락, 같은 사람인데 내 상태에 따라 피아노 소리는 늘 달라.
날카롭게 들릴 때도, 경쾌하게 들릴 때도, 카랑카랑하게 들릴 때도 있지. 나는 손에 힘을 푸는 법을 잘 몰라서, 부드러운 음색과는 거리가 먼 연주자였는데 오늘 아침의 소리는 나른했어. 연주 버릇들도 흐려져 한결 담백했고. 능숙하지는 않지만 편안한, 오늘 아침의 피아노 연습이 마음에 들었어.
피아노 연습을 하다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완전히 깨어났는데, 갑자기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어. 정신이 조금씩 깨기 시작함과 동시에 떠오른 과거들이 있었어.
7년도, 2년도 더 된 과거들에 갑자기 마음이 동한 이유는 바로 어제, 그 과거를 현재처럼 감각했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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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아주 오랜만에(무려 6년!) 친한 언니를 만났어. 우리가 바투 지냈던 시절부터 우리가 만나지 않았던 시기까지를 꼼꼼히 채워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그 일들도 함께 이야기하게 되었어. 아주 오래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말을 하던 중에 그 일들이 아직 내게 징그럽게도 유효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지.
그 일들은 힘이 아주 세. 왜냐면 내가 그 일들에서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지.
사람마다 걸려 넘어지는 감정이 모두 다르다고 생각해. 나의 경우, 죄책감이 그런 감정이야. 죄책감이 들면 활동하던 모든 마음이 중단되고, 그 자리에 주저앉게 돼. 잘못을 저질렀으니 더 이상 좋고, 빛나고, 아름다운 것들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 같아. 내 경우 모든 좋은 것들은 마음의 나아감에서 시작하기에, 마음을 중단함으로써 내게 벌을 내리는 거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하고 있어.
연습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 마음이 캄캄했어. 속 깊은 곳부터 얕은 곳들까지 마음이, 하나둘 주저앉기 시작했어. 절망스러웠어. 또 시작이구나, 하고.
그런데 신기하게도, 건물 밖으로 나와 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를 하고, 장을 보고, 볕이 들어 반짝반짝한 나무 아래를 걷는데 마음들이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어. 그저 평소처럼 몸을 움직였을 뿐인데.
이건 어떤 상태일까, 독서실을 향하며 생각했어. 그 길 위에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건 감정을 느끼되(수용하되) 잡아 먹히지 않은 상태구나’였어.
죄책감을 느끼되 그것에 잡아 먹히지 않는 상태. 그 낯선 상태가 반가웠어. 그렇다면 내게 익숙한 상태는 무엇이었을까.
죄책감을 느낄 때 나는, 늘 혼란스러웠어. 내가 스스로에게 가혹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자기 연민’하지 말라며, 그러면 또 같은 잘못을 하게 될 거라며 비난하고 몰아세웠어. 죄책감을 편히 느끼지도, 느끼지 않을 수도 없어서 늘 그 감정에 잡아먹혔어. 그 과정에서는 어떠한 수용도, 반성도 가능하지 않았고. 나를 벌주고 싶다는 마음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만이 격렬하게 부딪혔던 것 같아. 그럴 때면 나로 사는 것이 너무 곤란하고 싫었어.
오늘의 나는, 작은 연습실 안에서 마음을 중단하는 대신 피아노 치기를 중단하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어. 그 일이 내게 아직 유효하다는 걸 인정하고, 죄책감을 가지는 나를 받아들이고, 다만 과도한 감정들은 덜어내고, 하지만 그 일은 7년 전, 2년 전 일이라는 걸,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라는 걸 내게 조용히 알려주었어.
‘죄책감을 느끼는 나’를 온전히 수용했기에 그 감정에 잡아 먹히지 않을 수 있었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하고 있어.
달라진 나의 대처법을 돌아보며, 정말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구나 신기해하고, 뿌듯하고, 한편으론 조금 서운해하고 있어.
늘 과거와 연결되어 있고 싶어서, 과거에 가졌던 빛나는 것들이 영원히 유효하길 바라서 끊임없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연결시키려고 했는데, 어쩌면 끊어짐이, 분리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어. 지금에 충분히 머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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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너는 어떤 감정에 자주 걸려 넘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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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중, 조금 이른 여름휴가를 다녀왔어.
강원도는 아침저녁으로 쌀쌀하여 제대로 피서했지.
몽글몽글 동화 같은 풍경을 기대하고 갔던 대관령 목장은 안개가 짙어 상상해 보지 못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미지 속에 있는 게 기묘한 한편 설렜어.
그 풍경들을 함께 보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