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찌뿌둥한 날씨가 계속되었어.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볕이 나는 것도 아닌. 표정 없이 습한 날씨.
하루는 괜찮았고, 이틀도 참을만했는데 사흘째가 되니 마음이 날씨를 따라 가라앉기 시작했어. 그런데 조금 전, 창밖의 명도가 달라져 나가 보니 하늘이 개고, 찢긴 화장솜 같은 구름 사이로 몇 줄기 볕이 내리고 있었어. 조금 신이 나서 마당 봉선화 밭에 물을 주고, 오전부터 미루고 있었던 요가와 샤워를 했어.
햇빛을 대체할 수 있는 게 아직 나에게는 없어서, 이렇게 종종 한동안 볼 수 없게 되면 그 귀함을 느끼곤 해. 부재가 존재를 증명한다는 어느 유명한 말이 떠올라.
이번 장마가 길다는데,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해.
결, 너는 이번 장마에 어떻게 대처할 예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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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소는 도서관이야.
중학교에 다닐 때 자주 왔던 곳이라 내게는 익숙한 공간이지.
하지만 그게 벌써 십 년도 더 된 일이라, 고향에 내려와 처음 도서관에 가던 날에는 속으로 '많이 바랬겠지?' 생각하며 조금 긴장했어. 그런데 도서관은 마치 회춘이라도 한 듯, 반듯하고 낡은 티가 나지 않았어.
산 아래 지어진 곳이라, 그리고 지금은 여름이라서 도서관에서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온통 숲이야. 책상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가끔 들어 창문을 볼 때면, 눈이 참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고 또 이런 호사가 다 있나 싶어 행복해져. 어릴 때부터 자연을 좋아했지만 요즘에는 '인간은 주기적으로 자연을 느낄 필요가 있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맹신적으로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
결, 너는 얼마나 자주 자연 곁에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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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도서관에서 여섯 시간 정도를 머물며 공부하고, 점심을 먹고, 책구경하고, 주변을 산책하기도 해. 앞으로는 머무는 시간을 조금 더 늘려볼까 하고 있고.
수험 생활의 숨겨진 장점 하나는 바로 공부와 관련되지 않는 책을 아주 재밌게, 속독할 수 있다는 거야.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제 소설책 읽고, 에세이 읽던 좋은 시절은 다 갔네! 했었는데(웃음) 그때보다 더 많이 읽고 있는 것 같아.
열람실에서 공부하다가 식곤증이 올 때즈음 아래층 종합자료실로 내려가 잘 익은 열매를 수확하는 기분으로 서가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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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괜찮은지, 좋은 생활을 하고 있는지 판단하는 나름의 기준 중 하나는 바로 시간이 흐르는 주관적 속도를 측정하는 거야. 괴롭도록 느리게 흐르거나 포착하기 어려울 속도로 빠르게 흐르는 건 좋지 않은 신호지.
시간이 대체로 제 박자에 맞춰 흐르지만, 가끔 느려질 때, 시간의 흐름을 그렇게 느낄 때가 내게 가장 좋을 때인 것 같아. 그리고 도서관에서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
결, 요즘 너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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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아래 조용한 절처럼 지어진 이 도서관이 내 일상의 공간이 되는 시간은 유한해.
끝이 명확히 정해진 일상이지. 그래서 더 감사히, 귀하게 여기며 지내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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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지난주 편지에서 내가 대구 여름 괜찮다고, 나무 그늘 아래 있는 것 같다고 했었지? 대구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직 여름 오지도 않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냐고 하더라고. 나는 어제도 35도였잖아? 하고 대답하다가 퍼뜩 상기하게 되었어. 38도까지는 가볍게 올라가던 대구의 여름을! 그래서 지난주에 했던 이야기들을 정정하려 이렇게 편지 말미에 덧붙여.
(하지만 이번 여름이 기대되는 마음은 아직 여전해.)
그럼 결, 우리 다음 주에 또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