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어제는 하루 종일 집에서 여유롭게 해야 할 일을 한 고요한 하루였는데, 머릿속은 들끓는 솥처럼 복잡했고 마음이 지쳤어. 해야 하는 일들이 어려웠거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보내면 되는 날이었지만, 그렇지 않아 신경 쓰였어. 도대체 왜 이런 건지.
그 이유는 어젯밤, 잠이 오길 기다리며 휙휙 릴스를 시청하고 있는 엄마를 보며 깨닫게 되었어. 마침 읽고 있던 책이 지루한 대목에 들어선 찰나여서, 엄마 옆에 누워 릴스가 우리 뇌에 미치는 영향 설교를 시작했지.
'우리 몸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중에 '도파민'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보상 담당이다. 어려운 과제를 해냈거나, 우리가 생존에 이로운 행동들을 할 때 도파민이 나와서 기분이 좋아지고, 또 그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릴스 등 자극적인 콘텐츠는 이런 보상 체계를 훼손한다. 짧고 농도 짙은 자극을 연속적으로 시청함으로써 도파민이 폭발적으로 분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상받을 만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도파민으로 가는 아주 쉽고 간단한 경로가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다니던 조금 어려운 길은 어떻게 되겠는가? 가지 않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알게 된 것이지. 오늘 하루가 이토록 어려웠던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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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이었나? 나의 도파민 체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되어 인스타그램 등의 고자극 매체 앱들을 모두 지웠어.
그리고 그 앱들을 다시 깔고 로그인하는 수고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갈망이 심할 때만 다시 앱을 깔고, 잠시 확인한 후에 앱을 지우기를 반복했지. 또다른 규칙은 기상 최소 8시간 후에 앱들을 보는 것이었어.
하지만 최근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른 아침 시간이나 점심을 먹은 후 잠이 올 때 잠깐씩 도파민이 도는 콘텐츠들을 보면 효과적으로 잠을 깨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앱을 깔고 지우는 것을 반복하는 것보다 틈틈이 필요할 때 보되, 총 사용 시간을 설정해 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 며칠 동안은 아주 만족스러웠는데, 점점 처음의 다짐이 흐려지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잠을 깨운다는 명목으로 콘텐츠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어.
어제도 눈을 뜨자마자 SNS를 확인했고, 그래도 잠이 깨지 않아 유튜브를 보았지. 그리고 나니 세상 모든 게 귀찮아졌어. 독서모임 책 읽기, 스터디 대비 공부하기, 글모임 글 마감하기 등등 조금 난이도가 있는 활동은 물론, 밥 먹기, 씻기, 운동하기, 소설 쓰기, 친구 연락에 답장하기 등 루틴화되었거나 좋아하는 활동까지 모두. 앞선 설명을 빌리자면, 도파민을 얻을 수 있는 쉬운 길이 생겼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건 하기 싫고, 또 그만큼 그 일들에 대한 난이도가 높아진 것이지.
엄마에게 하던 설명을 이어 나갔어. 이제 그 이야기는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어. 방에서 나와 다시 거실 책상에 앉아서 앱들을 삭제했어. 마지막으로 피드 한 번은 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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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아침. 각오가 남달랐어. 오늘은 네게 편지 쓰는 날이기도 하니까. 반짝반짝 빛나는 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질 나쁜 과정으로 도파민에 절여진 뇌는 용납할 수 없었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후프를 돌리고, 밥을 먹고, 씻었어. 그런 후에 조그만 난관이 찾아왔어. 영어 단어를 정리해야 하는데 너무 하기 싫더라고. 하지만 아침에 이 과제를 성공한다면 오후부터는 하루가 술술 풀리겠다는 직감이 있었지. 그렇게 오늘 하루 해야 할 일들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일을 시작했어. 신기하게도, 단어를 정리할수록 기분이 좋아졌어. 아무래도 도파민이 나온 것이었겠지?
예상대로, 단어 정리를 끝내자 다음 일들이 자연스럽고 에너지 낭비가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어. 그 흐름을 타고, 지금 너에게 편지 쓰는 이 시간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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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책이 유행이라고 해. 아직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제목이 참 마음에 들어.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갖다 버린 것도 아닌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니. 정말 신선하지 않니?
잃어버린 것, 갖다 버린 것과 도둑맞은 것의 차이는 집중력 부재 사태에 대한 책임의 정도겠지. 도둑맞은 사람에게 왜 도둑맞았냐고 다그치는 것은 옳지 않으니까. 하지만 다시 도둑맞지 않을 수 있는 대비책 정도는 일러줄 수 있을 거야.
그 책에도 SNS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고 해. 조만간 책을 읽어보고 네게도 감상 전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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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소식과 함께, 안타까운 사건들이 하루 종일 보도되었어.
빗소리가 이전과는 다르게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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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결, 우리는 다음 주에 또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