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가장 좋아하는 나무를 묻는 말에, 종종 청단풍이라고 답하곤 해. 하늘과 가장 바투 닿은 부분의 잎이 별 부스러기처럼 잘고, 초겨울, 때로는 이듬해 봄까지 내내 푸른 잎을 떨구지 않는 나무야.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서관 뒤편에 한적한 청단풍숲길이 있었는데, 종종 그곳 벤치에서 점심을 먹곤 했어. 샐러드김밥이나, 삼각김밥, 때로는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그때는 혼자 밥 먹는 일이 너무 어려웠어. 청단풍숲길은 식당에서 몇 번 체할 만큼 불편하게 밥을 먹고 나서야 찾게 된 아지트 같은 곳이었지. 그곳에서 보낸 시간 덕에 나는 청단풍을 알게 되고, 또 김밥을 더 좋아하게 되었어.
오늘 친구랑 만나 놀고 집에 돌아가려는데, 탈 버스를 눈앞에서 놓쳤어. 친구도 데려다 줄 겸 다음 정류장으로 걸었어. 갈림길에서 친구와 헤어지고, 길을 확인하는데 길을 잃었더라고. 직진만 하면 되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하고 멍하니 서 있는데 그때 그 숲길이 눈에 들어왔어. 길만 건너면 닿을 곳에 그 예전의 숲길이 있었어.
좋아 그렇다면 숲길 옆에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 타야지, 하며 그곳으로 향했어. 조금 긴장되었어. 예전에 좋아했지만, 오래 떨어져 있었던 것에 다시 다가설 때면 늘 긴장하곤 해. 그쪽은 그대로일까, 내가 여전히 그것을 좋아할까? 너무 아련해지는 건 싫은데, 하며.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 옛날의 버스정류장 위치까지 헷갈려서 숲길을 다 걷지는 못했어. 중간 즈음까지 갔다가 다시 입구로 빠져나왔지. 하지만 별부스러기 같은 꼭대기 잎들을 보았고, 한 번씩 다 앉아보았던 것만 같은 벤치들을 훑어보았어. 연일 폭염 경보가 울리는 오후,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우렁찬 매미 소리가 팔 차선 도로의 소음을 가려주었어. 그래서 마치 꿈속 같았어.
결, 너는 어떤 나무를 가장 좋아하니?
*
요즘, 시를 가까이 두고 싶은 날들을 보내고 있어.
시를 읽고 싶은 마음. 그건 내게 늘 궁금한 마음이었어. 시를 읽고 싶은 마음은 '시 한번 읽어볼까?' 같은 방식으로는 내게 잘 오지 않아. '지금 꼭 시 읽어야 해' 같은 강력한 명령형으로 다가오지. 그 마음에 대해 종종 생각해. 조금은 공허하고, 허무하고, 회복해야 하는 것이, 또는 버려야 하는 것이 있을 때 시를 읽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럴 때 시를 읽으면 안심이 돼. 나만 이렇게 복잡한 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서 오늘 외출 준비를 하던 긴박한(지각 위기였거든) 순간 속에서도 시집 한 권을 챙겨 나갔어. 버스에서는 땀을 식히느라, 식당에서는 음식에 감탄하느라, 거리에서는 친구의 표정을 살피느라 시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카페에 들어가 주문하고 음료를 기다리는데 그제야 시집 생각이 났어. 내가 오늘 들고 나섰던 시집은 박시하 시인의 <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야.
친구에게 목차를 보여주며 제일 마음 가는 제목을 골라보라고 했어. 친구는 오래 고민하다가 하나만? 하고 물었고, 내가 그럼 두 개!라고 답하니 다시 골똘하게 시집을 들여다보더니 '4갠데...'라고 곤란하게 나를 쳐다보았어. 친구가 시를 4편이나 고른 게 기뻤기에 얼른 같이 읽어보자고 답했지.
수박주스와 망고오렌지주스를 마시며 우리는 그 시들을 눈으로 읽고, 짧은 감상을 나눴어. 왜 그 제목들이 좋았는지도 물었는데, 대답을 들으며 요즘 친구가 하는 생각과 친구의 마음 상태를 조금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어. 시집으로 보는 타로 같았달까? 이제 한동안 약속이 있는 날이면 시집을 챙겨 나갈 것 같아.
결, 너에게도 주기적으로 필요해지는 무언가가 있니?
*
요즘은 경보 알람이 정말 많이 울리는 것 같아. 경보를 확인할 때마다 긴장되고, 두려워.
해수면이 상승할 거라고, 고지대로 이사 가자고 가족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정말 곧 한국이 다 잠기는 게 맞다면 나라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있겠냐는 말을 들었어.
나도 아마 그럴 거라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이만큼 나빠지기까지 늘 조용했던 것 같아서, 나는 여전히 겁이 나.
그럼에도 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마무리할게.
그럼 결, 우리는 다음 주에 또 만나자.
2023.07.30. 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