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이번 주말, 동네 친구들을 만났어.
여섯 살, 여덟 살, 열한 살. 그 친구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내 나이야. 친구들을 모르고 산 기간보다 알고, 친하게 지낸 시간이 이제 훨씬 더 길어졌다는 게 재미있고 생경해.
처음 그 친구들과 친해지던 때에는 우리가 왜 친해졌는지, 언제까지 친하게 지낼 수 있을지, 우리 관계에 문제는 없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하지 않았어. 온 동네를 뛰어다니고 불량식품들을 나누어 먹기에도 매일 시간이 부족했거든. 그리고 그때는 멀어진다는 게 무엇인지도 잘 몰랐고.
하지만 이제는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에,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해. 우리 어떻게 친해졌더라?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우리 관계 문제없나? 하지만 그런 물음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건 아무래도 위험한 일인 것 같아서 친구들에게 이야기하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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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 글모임 하나를 꾸렸어. 그리고 이제 마지막 회차를 남겨두고 있지. 써야 할 글의 소재는 '고백'이고, 형식은 '편지'야. 그 숙제를 받아 들고는 내내 누구에게 편지를 쓸지 고민했어. 누구에게 쓰던 그 사람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편지를 쓰고 싶었어. 그렇다면 편지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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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슈탈트 심리치료 기법 중에 '빈 의자' 기법이라는 게 있어. 내담자 앞에 빈 의자를 놓아두고, 누군가 그 의자에 앉아 있다고 여기고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하는 기법이야.
의자에 앉힐 누군가는 응어리져 있는 기억에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는 사람이야. 게슈탈트 치료에서는 '미해결 과제'라고 부르는, 지나간 일이지만 마음에 남아 현재의 내가 살아가는 데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사건을 직면하여 다루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 '빈 의자' 기법은 미해결 과제를 다루는 하나의 방법이지.
미해결 과제는 보통 내가 그 당시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행동을 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데,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1) 그때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서, 또는 2)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적/외적 상황 때문에 하지 못했을 때로 나뉘어.
미해결 과제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 나에게 지속적으로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인데, 미해결 과제와 비슷한 상황에서 긴장이나 불안을 느낄 수 있고. 분노, 죄책감, 우울감 등을 느껴 이후의 현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야.
이때 빈 의자가 도움을 줄 수 있어. 빈 의자에 해결되지 않은 사건 속 중요한 인물을 앉혀두고, 그 사람과 대화하며 1) 그때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게 무엇인지 탐색할 수 있고, 또 2) 그때 하지 못한 말을 함으로써 해소의 감정을 느낄 수 있지.
나는 의자 대신 편지를 이용해서 내 미해결 감정을 해소하고 싶었던 것 같아. 의자에 진짜 사람을 앉히지 않는 이유는,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내담자가 그것을 위협적으로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야. 내가 과제로 쓸 편지를 실제 수신자에게는 보여주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 것은 후자의 이유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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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후보가 있었고, 몇 명에게 편지를 쓰다가 실패했어. '이걸 왜 쓰고 있지?'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 미해결 과제가 아니었던 거야.
그러다 한 날, 도서관 계단을 올라가다 떠오른 친구가 있었어. 그 친구가 떠오르자마자 컴퓨터실에 가서 편지를 뚝딱 한 시간 만에 완성했지.
그 친구는 내가 이번 주말 만난 친구들 중 한 명이었어. 우리가 너무 다른 사람인 것 같아서, 그리고 그게 몇 번은 상처가 되어서 그 친구랑 멀어지고 싶다고 생각했었거든.
그 친구에게 상처받은 순간들이 내게 미해결 과제였어. 우리 사이에 상처는 너무 낯선 것이라서 나는 내가 받은 상처를 며칠이 지나서야 깨닫기도 했고, 또 어떤 말을 듣고선 불쾌하다 고백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서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이 누적되었지. 그래서 그냥 멀어지는 것으로 도망가고 싶었던 것 같아.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그게 내가 진짜 원하는 게 아닌 것 같아서야.
그래서 그 친구에게 편지 썼어.
내내 품고 있던 마음이라서 그런지 편지가 술술 써졌어. 나는 너를 이제 예전처럼 대할 수 없다고, 그때 네가 보인 반응이 너무 충격적이었다고. 그 이야기를 쓸 때는 다시 화가 났어. 그런데 그 이야기를 쓸수록 화가 걷어지고 내 진짜 마음이 보였어.
- 나 그때 너무 화났지만, 그걸로 너랑 멀어지고 싶지는 않아.
내내 찾아 헤매었던 마음을 만나니 갑자기 편안해졌어. 그간 마음을 채우고 있던 혼란함이 스르륵 녹아 사라졌어. 내가 그동안 힘들었던 이유는 그 친구와의 관계에서 내가 느낀 불쾌감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불쾌감을 해결하지 못해서 내가 후회할 선택을 할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던 것 같아.
편지를 쓰고는 정말 깊이 안도했어. 그리고 자신감이 생겼지. 나는 이제 내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 친구와 앞으로 지내며 비슷한 상황을 만날 때 그것이 미해결 과제가 되지 않게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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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 친구들과는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가 함께 놀며 자랐던 동네에 모여 놀았어. '우리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같은 생각이 떠오를 틈 없이 떡볶이나 양념 곱창 같은 맵고 자극적인 음식(어른 버전의 불량식품이랄까!)을 호들갑 떨며 나누어 먹고, 맥락 없는 농담들에 웃고, 너무 웃어서 울기도 하고. 홀딱 빠져서, 그렇게 내내.
천성인지, 다시 혼자가 되어 편지 쓰고 있는 지금은 조금씩 또 '우리 관계는...' 이런 생각이 들기는 해. 하지만 이제 아무렴 괜찮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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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모든 답은 내 마음 안에 있다'라는 식의 명언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내 마음을 알고, 그것에 응답하는 일의 힘을 점점 실감하고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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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너에게도 부치지 않을 편지를 쓰고 싶은 사람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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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가고, 바람이 선선해졌어. 말복이 지난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처서가 얼마 남지 않았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는 내가 가장 아끼는 시기야. 그 계절 동안에도 늘 편지할게.
2023.08.12. 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