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나는 지금 서울에 있어.
고향에 간 후에도 한 달에 한 번은 두고 온 방을 돌보러 서울에 와.
서울에 두고 온 게 방만이 아니라서 이런저런 일정을 함께 잡아.
이번에는 두 번의 독서모임과 한 번의 글모임, 두 편의 공연 그리고 상담. 체력과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 곳의 전시장에 방문하는 게 계획이야.
서울에 살 때는 한 달에 걸쳐 소화했던 일정들을 사나흘 정도 되는 날들에 빼곡히 잡아두고서는 '이게 맞나..?'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모두 좋아하는 일이라 어떤 것을 뺄 수 없었어.
어제는 모임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났어.
글모임이든, 독서모임이든 내가 그곳에 가는 이유는 하나야. 사람을 만나려고. 책과 글을 도구로, 사람들 마음에 조금 더 바투 닿아 보려고.(물론 책과 글쓰기 자체도 사랑하지만!)
이번 모임에 가서 나는 '낙관'의 중요성에 대해 두루 이야기했는데, (요약하자면 살아가는 데는 낙관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낙관의 큰 동력 중 하나가 모임들이라는 걸 깨닫고 혼자 작게 웃었어.
*
오늘은 공연 두 편을 보는 날이야. 두 공연 사이 시간이 여유로워 지금 한 편을 본 후 근처 카페에 앉아 이 편지를 쓰고 있어.
방금 보고 온 연극의 제목은 <나는 뭐야?>야.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흐릿하고, 공연 시작 전부터 배우들이 나와 관객들과 담소 나누고, 공연 내내 사진/영상 촬영도 가능한(!) 놀듯이 볼 수 있는 편한 공연이었지. 하지만 공연이 건네는 질문은 나에게 마냥 웃으며 답할 수 없는 것이었어. 나는 뭐냐니..
공연이 시작되고, 배우들이 포스트잇과 사인펜이 놓인 책상을 관객석 앞으로 끌고 왔어. 그리고 요청하였지.
나는 ( )이야.
이 괄호를 채워 문장을 완성해 적어달라고.
결, 너에게도 같은 질문을 건네고 싶어.
결, 너는 뭐야?
*
연두색 포스트잇과 초록색 사인펜을 고민 없이 골라 자리로 돌아왔지만, 크게 당황한 상태였어. '이 질문에 당장 답하라고? 평생에 걸쳐 고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속으로 생각했지.
SOS를 요청하는 마음으로 배우들을 쳐다보기도 하고, 전 회차 관객들이 남기고 간 문장들을 훔쳐보기도 했지. 그러다 번뜩 떠오른 문장이 있었어. 망설임 없이 그 문장을 적어, 포스트잇을 배우에게 건넸어.
- 나는 지금이야.
나는 그렇게 썼어.
*
배우들이 공연 중에 우리가 써낸 문장을 두 번에 걸쳐 읽어주었어. 내 문장이 읽힐 때, 나는 상기되었어. 그 문장이 좋았어. 공연장에서 나오면서도 그 문장 생각을 했어. 공연 형식에 맞게 문장을 적었지만, 마음에 떠오른 문장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어. 그 문장을 메모장에 다시 써보았어.
- 나는 간절히 지금이고 싶어.
*
나는 지금이 되고 싶어.
과거의 나를 놓아주고 싶고, 미래의 나를 오해하고 싶지 않아.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잊고 싶지 않아. 살아 있는 '나'는 지금 여기에만 있다고.
그게 내겐 늘 어려웠고, 그래서 자주 불안하고 화가 났어.
오늘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도 나는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 사이를 오가고 있었어. 그래서 '지금'은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과거로 툭툭 밀려났지.
그건 곧 일어날 어떤 사건 때문이었어. 공연장에서 누군가를 마주치는 일.
그 사람과 나는 한때 가까웠지만, 이제는 인사 나누지 않는 사이가 되었어. 그건 내 선택이었고. 나는 그 선택 때문에 오랜 시간 나를 미워했었어. 이제 더 이상 그 일로 나를 몰아세우지 않지만, 그 사람을 보는 건 여전히 내게 어려운 일로 여겨졌어.
그래서 과거를 생각하며, 지금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복기하며, 아무런 수확 없이 다시 그 일을 경험했어. 그리고 그 사람과 마주하게 될 가까운 미래를 상상하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나를 끌고 와서 리허설을 시키고 다그쳤어.
그건 한창 아침을 먹고 있었던 때였는데, 문득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낮게 중얼거려 보았어.
'나는 카레맛 닭가슴살과 파프리카 샐러드를 먹고 있어. 나는 내 방 책상 앞에 앉아 있고, 선풍기 바람이 시원해.'
그렇게 말하니 조금 놀랍게도 마음이 진정되었어. 아마 나는 그때 포스트잇에 적을 문장을 알게 된 걸지도 몰라.
*
공연은 즐거웠어.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잡아 와 괴롭힌 게 무색하게. 공연에 몰입하며 '지금'에 머물 수 있었어. 내가 지금, 여기에 부재할 때 무섭게만 느껴졌던 일들이,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대부분 해결되었어. 마법같이.
지난 편지에 스스로를 알고, 수용하는 것의 힘을 절감했다고 썼던 것 같아. 사실 그 편지를 쓰면서, '이제 나 좀 능숙해지지 않았나?' 했는데 아직 발견하지 못한 길이 한참 남은 것 같아.
그래도 낙관하는 마음으로 계속해 보고 싶어.
*
그럼 결, 이번 한 주 평안하게 보내길 바라.
또 편지할게.
2023.08.20. 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