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한 주를 정신없이 보냈는지, 오늘이 벌써 너에게 편지하는 일요일이라는 게 조금 낯설어.
이번 주 수요일 오전까지 서울에 있다가 오후 느지막하게 대구로 돌아왔어. 대구로 돌아온 후에는 다시 일상에 적응하느라 마음을 바쁘게 움직였어. 그랬더니 서울에 다녀온 것이 까마득해졌었지.
너에게 무슨 말을 할까, 이야깃거리를 찾으려 기억을 되짚어 보고 있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보일러가 고장 난 일이야. 에러 코드가 뜬 보일러에 대해 상담하고, 기사가 방문하기까지 이틀이 걸렸어. 집 관리인이 수리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처해서 답답했지. 결국 직접 a/s 신청을 하고 결제까지를 마쳤어. 수리비는 14만 원이었어. 관리인에게 영수증과 보일러실 사진을 전송했어. 그런데 하루, 이틀이 지나도 답장이 없었어. 곧 대구로 돌아가야 했기에 마음이 조급했지. 크게 문제 될 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초조했어.
대구로 돌아가기 전날까지 관리인과 연락이 닿지 않았고, 다음 날 아침에 전화를 해야겠다 다짐했어. 그뿐이었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나고 불안했어. 왜 이렇게 마음이 요동치는 거냐고 스스로에게 따져 묻기도 하고(이건 좋지 않은 선택이지만 오랜 습관이기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어), 고작 14만 원(적지 않은 돈이지만, 이만큼 불안해할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어)이라고 못 받아도 괜찮다고 달래기도 하고, 혹시 내가 돈 때문이 아니라 답장받지 못한 것 때문에 화가 난 것인지 확인해 보기도 했어. 영상 콘텐츠로 주의를 돌려보기도 하고, 샤워로 환기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실패했어. 그 모든 과정의 기저에 지대한 짜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야.
'...나 왜 이래?' 심각한 표정이 되어 질문하다가 갑자기 깨닫게 되었어. 고카페인 함유 음료를 늦은 오후에 마셨다는 걸. 그걸 떠올리자 갑자기 모든 게 괜찮아졌어. '아, 그 진한 밀크티 때문이었구나' 생각하니 모든 게 괜찮더라고. 지금의 이 짜증과 불안에 대한 납득할 만한 원인을 찾았고, 그 원인이 그저 향정신성 물질의 작용이었기 때문에 그 물질의 작용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걸 알게 되어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어.
감정에 대한 여러 이론 중, 신체적 반응에 대한 해석으로 감정이 결정된다는 이론이 있어. 가령, 내가 심장이 빨리 뛰고 호흡이 가빠지는 등의 신체적 반응이 있을 때 그 반응의 원인을 지금 눈앞에 있는 큰 개로 해석하면 감정은 '두려움, 공포'가 될 것이고, 버스를 타기 위해 뛰어서 그런 거라고 해석한다면 별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겠지.
나 또한 처음에는 짜증이 나고, 호흡이 불편한 신체적 상태를 '빨리 연락을 안 주는 관리인'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답답함이 가중되는 한편, 이렇게까지 흥분할 일인가? 하며 혼란스러워했던 것인데, '고함량 카페인 음료'라는 다른 원인이 등장하여 감정이 누그러지게 된 거야.
재미있는 발견이었지만, 몸이랑 머리랑 마음이랑 이렇게 소통이 안 되어서야(너무 잘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참 피곤하다는 생각도 들었어.
한편으로는 너무 맛있었던 그 밀크티를 마시려면 이만큼의 짜증을 감당해야 한다니 조금 슬프기도 했어. 정말 맛있었거든. 원래 고수를 잘 못 먹는데, 그 밀크티와 조합이 좋아서 고수 맛에 눈을 뜨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들어, 관리인 때문에 이미 조금 답답한 상태였으니, 카페인의 작용이 더 강해졌을 수도 있다고. 그러니 마음에 한 톨 걱정도 없을 때 그 카페에 다시 가면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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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나는 몸과 마음이 어떤 상관이 있는지 잘 자각하지 못했어. 나는 내 몸의 모양이나 기능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과 분리하려고 시도했던 것 같아. 지금은 20대 후반이 되어 이제껏 잘 몰랐던 장기들이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요가를 통해 몸의 안정과 이완이 마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반대로 마음가짐이 몸의 컨디션을 어떻게 바꾸는지 여러 사례로 알게 되면서 몸과 마음 사이의 여러 작용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어. 몸이 안 좋을 때는 마음을 가다듬고, 마음이 어려울 때는 몸을 움직이며 그 둘 사이에 흐르는 에너지들을 잘 활용해 보려 노력하고 있어.
마음이 심란할 때는 샤워를 해서 피를 돌게 하고, 요가를 해서 긴장을 풀어주거나 맛있는 걸 입에 넣어주기도 하고,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는 명상을 하거나 감사일기를 써보기도 해. 피아노를 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어.
결, 너에게도 마음이 어려울 때 하는 신체 활동, 그리고 몸이 좋지 않을 때 하는 마음 활동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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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초입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무더운 8월 말이야.
특히 볕이 강한 요즘인 것 같아.
가을 볕도 여름 볕 못지않겠지만,
그런 볕 아래서도 피부에 닿는 공기가 선선하게 느껴질 계절을 기다리고 있어.
그럼 결, 우리는 다음 주에 다시 만나자.
2023.08.27. 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