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이제 구월이야. 나는 가을의 달 들 중 시월을 가장 좋아하지만, 구월은 의미 있는 달이라고 생각해. '이제 가을이야!' 알려주는 달이니까.
팔월과 구월은 이어진 달이지만, 나에게 그 둘은 멀리 떨어진 시기처럼 느껴져. 흐름 상으로 구월은 환절기지만, 왠지 그냥 온전히 가을 같아.
새로운 계절이 찾아오면 지난 계절을 회상할 틈도 없이 그 계절에 푹 빠지는 편인데, 올해는 보내버린 여름이 못내 아쉬워. 무지개를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타들어갈 것처럼 붉은 노을을 못 보았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늘 안정적인 온도를 유지하는 스노우볼 같은 도서관에서 날들을 보냈기 때문일까. 구월이 되어서, 무덥지 않아서 몸에 절로 생기가 도는 건 좋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쉬움이 맴돌고 있어.
가을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습한 날들이라, 여전히 하늘도 가까이 올려다볼 수 있는 날들이라 아직 실감은 나지 않지만, 지금은 구월이고, 또 가을이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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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공부를 열심히 했어. 방 구조를 바꾸어 주변을 환기했고, 각 공간을 용도에 맞게 사용했어. 침대에서는 잠만, 요가 매트 위에서는 운동만, 책상에서는 공부만 하는 식으로. 그러니 이제 책상에 앉으면 큰 저항 없이 공부를 시작하게 돼. 이전에는 공부하는 책상에서 밥도 먹고, 영상도 보고, 컴퓨터도 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공부에 몰입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었거든. 자취하던 때는 사용할 수 있는 면적이 작아 어쩔 수 없이 한 공간을 여러 목적으로 사용하곤 했지만, 본가에서 지내는 시간 동안에는 공간의 힘을 잘 활용하며 지내고 싶어.
공부를 끝낸 새벽에는 최은영 작가님의 신작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단편을 한편씩 읽었어. 그중 <일 년>이라는 작품은 4년 전 한 문예지에서 읽었던 작품이었는데, 다시금 읽으니 새로웠어. 내가 모든 줄거리를 잊고, 한 대목만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게 재미있었고.
내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머릿속 한구석에 잃어버리지 않고 놓아둔 대목은 바로 이 문장들이야.
"입사 초, 그녀는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회사 사람들을 어두운 마음으로 바라봤다. 좋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고통이었으므로, 그녀는 차라리 나쁘고 냉혹한 인간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여기는 편을 택했다. (...) 그들은 가치 없는 인간들이어야 했다. 네가 뭐라고 날 무시해? 그녀는 회사 사람들의 얼굴, 목소리, 몸짓 혹은 그들의 존재 자체에서 그들을 혐오할 수밖에 없는 혐의를 발견해 냈다. 자기 속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녀는 그 일을 매일 반복했다."
저 대목을 처음 마주했던 4년 전 나는, 첫 회사에 막 입사한 상태였고, 문장 속 '그녀'처럼 회사에서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혐오하는 마음을 키워가고 있었어. 그러다 저 문장을 읽고, 나의 방어기제가 나를 망가뜨리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많이 힘들어했었던 것 같아. 왜냐하면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나이 어린 여자라서, 힘이 없는 부서에 소속되어 있어서, 대표가 편애해서, 알아서 굽히지 않아서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싫어하지 않을 방도가 나에겐 없었고, 그들을 깊이 혐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마주하기가 어려웠어.
그런 사람들 중 대부분이 퇴사하고, 일부와는 친해지기도 하고, 또 다른 그런 사람들이 입사하고.. 또 나가고. 그러면서 서서히 무뎌졌던 것 같아. 다시 복기하다 보니 조금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지만, 나를 지켜보려고 열심히 지냈던 내 모습과 옆에서 든든히 지지해 주었던 사람들이 같이 떠올라서 눈물이 쏙 들어갔어.(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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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어려울 때 하는 일들 중 하나는 감사일기야. 어려울 때는 어려운 것만 크게 보이니까, 감사일기를 쓰면서 좋은 것들에도 초점을 두어 왜곡을 줄이고 균형을 맞추어 주는 거지. 그런데 요 며칠은 감사일기를 쓰는 게 자기기만 같이 느껴져 한 줄도 쓰지 못했어. 큰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도 자잘하지만 뾰족한 일들이 나의 마음을 덜컥 내려앉게 했어. 감사 일기도 통하지 않을 때는, 가장 몰두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시간이 약이야'라고 생각하는 게 지금까지의 내가 찾은 최선의 방법이야. 그래서 공부를 하고 책을 읽었어. 파고들어 오는 생각들을 애써 막으면서.
그래서, 이제 조금씩 그 일들이 무뎌지고 흐려지고 있어. 시간이 흐름에, 내가 집중하지 않는 정보들이 뇌에서 사라진다는 것에 감사해.
예전에는 '망각은 축복'이라는 말에 전혀 동의하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반절 정도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아.
결, 너는 '망각은 축복'이라는 말에 얼마나 동의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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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지를 쓰기가 망설여졌어. 마음 상태가 별로인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런 마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몰라. 그럼에도 쓰고 나니 내보인 마음이 그리 못나지도 않고, 글자에 감정을 걸러낸 덕에 마음이 한결 맑아졌어.
늘 기꺼이 읽어주어 고마워.
그럼 결, 다음 주에 또 편지할게.
2023.09.03. 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