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부산스럽게 내렸어. 아슬아슬하게 마른 옷을 입고 집을 나섰어. 버스가 오는지 내다보려 살짝 내민 머리에 물이 투툭하고 떨어졌어. 고데기로 겨우 체면을 살려 놓은 앞머리가 젖고, 버스는 전 역이라고 뜬 지 오분이 넘어가는데도 도착하지 않았어. 버스에 타서는 에어컨 바람으로 필사적으로 앞머리를 말렸어. 조금 뽀송해졌나 싶었는데 환승 정류장에서 다시 그대로 젖고 말았지.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보러 가는 길인데, 왜 이렇게 비가 성가시게 내리는지 조금 짜증이 났어.
하지만 친구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오늘 비가 와서 참 좋다 생각했어.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풍경이 운치 있어 보였고, 카페에서 마신 따듯한 차와도 비가 잘 어울렸어. 카페 입구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어. 흰색, 치즈색, 검은색이 모두 섞인, 덩치가 작은 고양이었어. 카페 카운터에 그 고양이를 그린 듯한 캐릭터 포스터가 있어서 사장님께 물어보니 그 고양이가 맞다고 하셨어. 사장님은 고양이가 가게로 들어오면 키우고 싶은데, 경계가 심해서 밥과 물을 챙겨주는 사장님에게도 아직 한 번도 다가온 적이 없다고 해. 벌써부터 포스터를 만들어 놓고 고양이가 마음을 열어주길 기다리고 있는 사장님이 조금 귀여웠어. 친구는 근처 편의점에 가서 고양이 간식을 사 왔어. '참치맛이 나는 겉바속촉' 과자라고 적힌 홍보 문구에 나도 모르게 맛있겠다고 생각했어.(웃음)
오늘은 친구의 이야기도 듣고, 내 이야기도 많이 했어. 우리의 벤다이어그램이 겹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수시로 넘나들며, 이야기를 나눴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순간 해방감이 들었던 때가 있었어. 친구가 운동하러 다니는 곳에 고등학생이 있는데, 그 아이가 자기는 어디 앉아서 일하는 건 상상할 수 없다고, 사무직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 말하는 걸 들으며 친구는 자신이 이상적인 직업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 옅어졌다고 말했어. 그 이야기를 듣는데 나도 머리가 조금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어. 인지하지 못한 순간에 서서히 정상성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납작해져 있던 시야가 탁 트이는 기분이었어.
삶의 다양성을, 사람의 입체성을 점점 간과하게 되는 것 같아. 다양성과 입체성을 인식하는 데에는 그것을 단일하고 납작하게 볼 때보다 더 큰 에너지가 드는데, 사는 건 바쁘고 에너지는 없으니 그것들을 아낄 수 있는 인지전략에 익숙해지는 거지. 편견도 그것의 한 종류라고 생각해.
에너지를 아끼는 것이 나쁘다 말할 수는 없지만, 편견이 혐오나 배제의 근거가 되기는 너무 쉽기에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해.
꼭 그것이 아니라도, 단맛만 가득한 인공 감미료보다 시고, 달고, 짜고, 감칠맛 나는 과일들을 더 좋아하듯이. 세상과 사람의 얕은 면면만을 보는 것보다는 그 깊이를, 세부를 알고 풍부하게 느끼는 것이 좋기 때문에 이제껏 바빠서, 또는 불안해서 쌓아놓은 정상성을 추구하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싶어. 무엇보다 그런 마음은 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평가하고 판단하게 되기에, 나랑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라도 버려야 할 것 같아. 며칠 전 읽은 소설에서도 이 이야기와 맞닿는 부분이 있었어.
"그 모든 평가와 판단을 모두 모은다고 해도 그것이 이모라는 사람의 진실에 가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최은영, <이모에게> 中)
내가 나를 향한 평가와 판단의 합이 아니듯, 타인도 그렇겠지. 이걸 늘 염두에 두고 살고 싶다고 오늘의 나는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한편, 타인이 나를 설명해 주는 말들은 내가 나를 알아가는 데에 힌트가 되어주기도 해서 재미있는 것 같아. 특히 내가 좋아하는 힌트는 내가 한 번도 그런 방식으로 나를 생각해 본 적 없는 관점의 이야기들이야. 가령, 나는 내가 굉장히 튀지 않고 전략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 나를 인상 깊고 순수하다고 할 때 재미있다고 느끼고, 또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내 모습을 알아볼 기회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
결, 너는 어때? 너에 대해 사람들이 하는 말들 중 낯설게 다가오는 것이 있니?
*
오늘은 동생이 오랜만에 집에 왔어. 직접 구워온 마들렌을 한가득 들고 왔더라고. 나도 친구가 선물해 준 베이글을 식탁에 올려두었고, 냉장고에도 케이크 시트가 하나 있어. 뭔가 집에 빵이 많으니 괜히 든든한 기분이야.
비가 계속 오고 있어. 비가 그치면 본격적으로 가을일까? 궁금해하고 있어.
그럼 결, 다음 주에 또 편지할게.
2023.09.16. 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