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갑자기 가을이 되었어. 어제 저녁, 요가를 하고 누워있다가 갑자기 한기가 들어 침대에 들어가 극세사 이불을 덮고 한참을 누워있었어. 하늘도 높아지고, 볕도 한층 더 투명해지고,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걸 보니 이제 명백히 가을이야.
결, 너는 어때? 가을이라는 걸 체감하며 지내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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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기 전, 늦여름의 옷자락이 한없이 늘어지던 구월의 초중순에, 사실 나 조금 힘들었어. 갑자기 모든 순간이 불안해졌었거든. 그전에는 할 일을 하지 않고 놀 때만 불안했었는데, 공부를 할 때나 밥을 먹거나, 씻거나, 일상을 위한 활동을 할 때 모두 불안했었어.
‘시험이 두 달 남아서 그런가?’하고 넘기려 했는데 그것 때문에 이렇게 불안해진다는 게 두 가지 의미로 용납되지 않았어. 첫째로, 내가 아는 나는 그것 때문에 이렇게까지 불안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 모습이 나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용납되지 않았어. 그렇게 나의 불안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채로, 그러나 하루종일 불안해하며, 할 수 있는 만큼의 공부를 다 하고서도 나를 혼내며 잠드는 날이, 나를 미워하며 깨어나는 날들이 이어졌어.
그러다 얼마 전에 서울에 다녀왔는데,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그 불안의 뿌리를 찾을 실마리를 발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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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너는 기차 타는 걸 좋아하니? 나는 기차 타는 걸 엄청 좋아해. 사실 모든 이동 수단을 타고 있는 순간을 좋아하는데, 그건 무엇을 해도 시간이 아깝지 않기 때문이야. 이미 이동이라는 걸 하고 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인데 덤으로 무엇을 하는 거니까. 그중 기차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자리가 고정되어 있고, 창밖 풍경이 탁 트여 있어서야.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바깥을 바라보며 멍 때리는 걸 좋아해.
이번에 서울 가는 길에도 딱 그렇게 멍을 때리다 잠이 들었어. 그리고 다시 깨어났는데,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갑자기 수능을 준비하던 때가 떠올랐어. 너에게도 언젠가, 내가 기숙 고등학교를 다녔다고 말한 적 있지? 거기서는 친구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어.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열등감과 죄책감을 느꼈었던 것 같아. 친구들만큼 간절하지 않고, 그렇기에 급식실에서 단어장을 보지 않는 내가, 주말 자습 시간에 봉사, 종교활동(종교도 없었는데!), 동아리 활동을 하며 독서실 밖에 있는 내가, 어떤 성적을 받아도 울지 않았던 내가, 부적절하게 느껴졌던 걸지도 몰라. 하지만 수능 성적은 나쁘지 않았고, 상향 지원한 학교에 추가 합격해서 선생님들의 축하를 받으며 입학했어.
왜 갑자기 이 사건이 떠오른 걸까, 이 사건이 지금 내 불안과 상관있는 걸까 생각에 잠겼어. 그리고 기차에서 내릴 즈음 답을 찾았지.
나는 수능과 대입 사건에 대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데 운이 좋았다’고 오래도록 생각해 왔던 것 같아. 그 생각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는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때문에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는 비합리적인 생각으로 변해왔던 것 같아. 그렇다면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 반문해 보았어. 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니, 행복하고 즐거웠던 것만큼 깊이 고민하고 치열하게 공부했다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다는 게 떠올랐어. 그간 모든 것이 운 덕분이었다고 여겼던 게 그때의 나에게 미안했어.
그리고 다시 여기로 돌아와서, 내가 불안했던 이유는 내가 이 상황을 통제할 힘을 전혀 가지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 운이 모든 걸 결정한다고 생각했으니 뭘 해도 불안했던 거야. 하지만 이제 오해가 풀려서, 불안이 적정한 수준까지 떨어졌어. 나를 혼내면서, 나를 미워하면서 잠들고 깨어나지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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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 일을 지나며, 내가 나와 화해했다는 생각을 했어. 미안함을 표하는 것도 나, 용서하는 것도 나의 역할이라 더 어려웠던 것 같아. 그리고 또 이렇게 나와 내가 화해할 일이 아직 몇 가지 더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지.
사실 힘들게 잠들고 깨어나던 날들에 ‘자기 용서’ 명상을 줄기차게 들었는데, 그것이 도움이 되었지만, 결국 모든 건 내가 나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시작된다는 걸 이번에 깊이 깨달았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앞으로도 나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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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너는 어때?
너에게도 너 자신을 용서한 경험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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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을이 깊어질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절로 환해져.
올가을이 우리에게 다정한 계절로 기억되길 바라며, 편지를 마무리할게.
다음 주에 또 만나.
2023.09.24. 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