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지금은 2023년 12월 31일 오후 4시. 8시간 후면 2023년은 작년이 돼.
아직 올해라고 부를 수 있는 2023년 끝의 끝자락에서, 내년으로 보낼 편지를 쓰고 있어.
어디서 편지를 쓸까? 고민했었는데 도서관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올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 그래서 조금 지루하긴 하지만, 익숙하고 편한 곳에서 마지막 편지를 쓰고 싶었어.
12월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올해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공부와 일을 병행하다가 이명을 겪은 일.
회사가 망해서 퇴사를 하고, 첫 시험에 낙방하고, 전세 보증금 문제에 시달렸던 일.
힘들었던 일을 나열하다 보니 조금 아찔해지기도 하지만, 그 시기를 지내면서 나름의 힘을 길렀던 것 같아. 위기와 실패 속에서 의미를 찾아보는 경험이 서른을 앞둔 시기에 아주 값지다 생각했어.
전세금을 무사히 받고, 합격 소식을 듣고, 지쳤던 몸과 마음도 회복된 상태에서 이 편지를 쓸 수 있음에 감사해. 올 한해 고생 많았네. 순간순간에는 고생인 줄 몰랐는데 지나오니 그런 생각이 들어.
결, 너도 고생 많았어. 어떤 날들을 보내왔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365일 동안 꼬박꼬박 잠들고 다시 일어나고, 끼니를 챙기고, 자신을 돌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내느라 고생 많았어.
*
3년 전부터였나. 새로 시작되는 한해에 이름을 붙여주곤 했어.
2022년에게는 ‘노력하고 성취하는 한해’
2023년에게는 ‘집중하는 한해’
이런 식으로.
그리고 2024년에는 이 이름을 붙여주려고 해.
‘가까워지는 한해’
그 이름을 붙이고, 나는 무엇에 가까워지고 싶나 생각하며 카테고리를 나누고, 세부 계획을 세워보았어.
내가 가까워지고 싶은 건, 세상과 사람, 나의 일, 그리고 나 자신이야.
세상과 접촉하는 방법은 참 많아. 신체 감각 기관으로 수용하는 모든 정보가 세상의 것이고, 여행을 하며 그런 정보를 증폭시킬 수 있지. 또 책을 읽으며 다른 사람들의 체험과 사유를 경험해 볼 수도 있을 거야. 봉사를 통해 나를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에 던져 볼 수도 있을 테고 돈을 통해 세상과 관계 맺을 수도 있을 테지.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것도 세상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아. 사람들 모두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또 하나의 세계이니. 그 세계를 경험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 마음이 통하는 순간과 어긋나는 순간을 기억하는 것. 그 세계를 기꺼이 궁금해하는 것.
오래 찾았던 나의 일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시간을 써보려고 해. 그 일을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가득해서, 방법을 모를 때는 열심히 물어보면서 그렇게 나의 일과 가까워져 보려고 해.
그런데 나와는 어떻게 가까워져야 할까?
혹시 이미 가깝게 지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아직 나는 나랑 꽤 어색한 사이라는 걸 최근 알게 되었어.
상담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어. 나는 위험을 대비하는 적당한 불안감이 아니라, 과도한 불안에 시달리는 게 힘들다고 말하던 중이었던 것 같아. 그런 불안감에 휩싸일 때 불안한 것과 더불어 나를 비난하게 된다고. ‘너 왜 이렇게까지 불안해 해?’ 다그치게 된다고.
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어린 시절 누군가로부터 그런 비난을 들은 경험이 있는지 물으셨어. 그 질문을 듣고 한 가지 일이 떠올랐지.
아홉 살 무렵.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어. 운전석에 무수한 표시등 중 한 개가 연료량을 지시한다는 걸 알게 된 무렵이었고, 그때 한 표시등의 화살표가 일순간 획 하고 왼쪽으로 돌아가는 걸 보았어. 나는 ‘어? 기름!’하며 불안감을 내비쳤는데, 그때 운전을 하던 어른이 그런 걸 네가 왜 신경 쓰냐며 화를 냈어. 이 이야기를 듣고 상담 선생님이 물으셨어.
“그때 기분이 어땠어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여전히 기름 때문에 불안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른이 화를 내니 무섭기도 하고, 혼날 말을 한 제가 수치스럽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때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어요?”
선생님이 아홉 살, 그때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냐 물으셨을 때 아무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어. 친절하고 포용적인 말을 떠올릴 수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었고, 진심의 말들은 모두 평가하고 비판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야. ‘도대체 왜 불안해 해??’ 그때 그 어른이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품고 있었어.
오랜 침묵 끝에 선생님이 자신이라면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줄 것 같다고 이야기를 시작하셨어. 깊이 공감해 주는 말들이었어. ‘갑자기 표시등이 바뀌어서 많이 놀랐지? 많이 불안했겠다. 괜찮아?’
언젠가는 나도 나에게 그런 말을 건넬 수 있을 거야.
*
나는 나로 사는 게 가끔 불편할 때가 있어.
내가 벗어나고 싶은 내 모습이 드러날 때가 바로 그런 때야.
가령, 다른 사람들보다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일 때.
2024년에는 나의 그런 불편함에 주목해 볼 생각이야.
나로 사는 게 편안해질 수 있도록, 나랑 가깝고 친하게 지낼 수 있도록.
*
결, 너는 어때?
너는 너로 사는 게 편안한지 궁금해.
*
그럼 결, 우리 2024년에 다시 만나.
새해복 많이 받길, 평안한 한해가 되길
마음을 담아 바라.
2023.12.31. 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