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그간 어떻게 지냈니?
아주 오랜만에 안부를 묻는 것 같아.
지난 삼월은 내게, 아주 천천히 구르며 몸집을 불리는 눈덩이 같았어.
어마무시한 크기로 내 앞에 도착한 눈덩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한 달이 흐른 것뿐인데, 한 세월이 흐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결, 너의 시간은 어떻게 흘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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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주 압도되었어.
세상이 주는 만족감에.
말러라는 학자의 관찰에 따르면, 영아들은 삶의 아주 초반, 막 설 수 있게 되는 그 시기에 엄청난 전능감을 느낀다고 해. 겨우 누워있을 수 있을 때나, 기어다닐 때와는 전혀 다른 시야와 기동성으로 세상을 누비며 "세상과 사랑을 나누는" 그런 시기가 있다고 해.
대학원에서 보낸 한 달이 나에게는 꼭 그런 시기였어. 신체적으로는 변한 것이 없으니, 모두 마음의 일이라는 건데, 뭐가 그렇게 좋았던 걸까?
먼저, 가장 좋아하는 이론에 대해 하루 종일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좋았어. 그 이론은 '대상관계이론'인데, 프로이트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성욕과 공격욕으로 가정한 것과 다르게, '관계' 욕구를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으로 보는 이론이야. 그러니까, 세상 무엇보다 관계가 중요하다는 거지.
이 이론을 좋아하는 이유는 첫째로, 관계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이기 때문이고. 둘째로, 이 이론이 나에 대한 가장 적합한 해석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야.
대상관계 이론을 통해서 이해할 수 없었던 나의 행동이나 동기,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관계에서 보이던 부적응적인 모습들도 많이 다룰 수 있게 되었어.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아마 이후 편지들에 묻어나겠지만, 한 가지만 먼저 말해볼게.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끝날 때 심한 죄책감을 가지는 편이었어. 끝난 관계에 책임을 지는 적당한, 그런 건강한 죄책감은 아니었고, 관계가 끝난 이유를 대체로 나에게 찾으며 자책하는 방식이었어. 명백히 상대에게 잘못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지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를 안쓰러워하고 걱정하기도 했는데, 그런 반응들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나를 다 너무 생각해 주니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하며 나를 더 몰아붙이기도 했어.
출처와 그 흐름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확실히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에 나는 그 감정이 '내가 무언가 잘못했다는 사실'의 '신호'라고 굳게 믿었어.
그런데 대상관계 이론가 중 한 명인 페어베언을 공부하며 생각이 조금 변하게 되었어.
페어베언에 따르면, 우리는 관계가 좌절되었을 때, 그리고 그 좌절이 자신이 견디기 어려운 종류일 때(주로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좌절), 방어를 한다고 해.
방어의 방법은 그 관계를 이어오던 대상을 여전히 좋은 상태로 두고, 자신을 나쁘게 만드는 거야. 가령, 부모에게 상처받은 아이가 부모 탓을 하지 않고, 자신이 그런 학대를 받을만했다고 생각하며 경험을 통제하는 거지. 친밀하게 관계를 이어오던 대상에게 잘못을 두는 일이 너무 깊은 좌절을 주기 때문에, 자신에게 모든 짐을 지우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이 가설을 이해했어.
신기하게도, 그 내용을 읽고 이해하기만 했는데도, 가끔 수면 위로 떠올라서 나를 괴롭히던 죄책감들이 조금 힘을 잃는 게 느껴졌어. 그래서 그 감정들을 꺼내 올려서 이 이론에 여러 번 대입해 보았어. 그러니 그 감정들이 '내가 무언가 잘못했다는 신호'에서 '나의 대상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짊어진 짐'으로 서서히 자리를 옮겨 가기 시작했어.
아주 오래전에 네게, '가장 자주 걸려 넘어지는 감정'이 무엇인지 물었었지?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죄책감'을 이야기했었어.
그 대답을 편지에 쓰며 조금 슬펐던가, 아니면 바짝 긴장했던가 기억나지 않지만 이제는 그 죄책감에 조금은 덜 걸려 넘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뿐하게 뛰어넘으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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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람들이 좋았어.
하루걸러 하루 안부 전화를 걸어 가족들과 일상을 나누었고,
20분 거리에 사는 동네 친구와 꽃구경을 하고 이야기를 실컷 나누었어.
여섯 살씩 어린 동기들과 동갑내기처럼 맛집 탐방을 다니고,
같이 발제를 맡은, 엄마와 나이가 엇비슷한 박사 선생님이 내 손을 꼭 잡아주기도 했어.
지도 교수님은 경쾌하게 나를 챙겨주셨고,
또 다른 교수님은 담백하게 나의 학습 의욕을 북돋아 주셨어.
오래 못 보았지만, 바로 어제 만난 것 같았던 독서모임 친구들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았고,
이래도 되나... 조금 두려워하며 룸메이트의 솔직한 마음을 보았어.
사람들이 가끔 나를 오해할 때도 해명하지 않았어.
지금 내가 가진 마음들이 충분히 마음에 들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그렇게 낙관했어. 혹여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고.
이런 이론과 사람들 속에 살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자주 압도되었어.
삶이 주는 만족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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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재미있는 게 뭔지 아니?
아까 말한 '막 걷기 시작해서 전능감을 가지는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다치기 쉬운 시기를 보내는 것이기도 해. 가령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기도 하고, 젓가락을 꽂으면 안 되는 곳에 넣기도 하고, 불을 잡으려 하기도 하면서.
나 또한 상기된 마음으로 그리고 각성된 뇌로 살며 무리를 하다가(무리한다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어느 날 심하게 앓고, 샤워를 하다가 쓰러져 버려서 며칠을 고생했어.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기쁠 때도 심장이 상한다고 엄마가 이야기해 주었고, 쇄골 사이쯤에서 깔딱거리던 얕은 호흡을 명치로, 단전으로 내리기 위해 명상을 시작했어.
*
사실 오늘 너에게 계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나는 계절로 무엇인가를 은유하는 걸 좋아해.
가령, 당신이 가진 화법은 어떤 계절을 닮았는지 묻는다거나, 너와 나의 관계는 어떤 계절에 있는지 고심해 본다거나, 각 음계와 가장 어울리는 계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거나 하며.
오늘은 너의 여름이 언제였는지 묻고 싶었어.
너의 삶, 어떤 시기를 여름으로 은유할 수 있는지.
왜냐하면, 나는 아주 오랜만에 여름을 만난 것 같거든.
비로소 여름이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비로소'라는 부사를 붙인 건, 모두가 '너는 여름에 있다고' 말하는 듯한 스물과 스물하나에 나는 여름에 살지 못했기 때문이었어.
그때는 주변 모두가 나와 같은 사람들을 보고 '너는 여름이야, 너는 여름에 있어. 무럭무럭 자랄 수 있고, 거침없을 수 있고, 그래야만 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
실제로도 그랬어. 주변의 모든 것들이 폭발적으로 자라나고 있는 것 같았거든.
그런 어느 열대 우림 같은 곳에 난 석고상으로 놓여 있는 느낌이었어.
녹지도 못하고 자라나지도 못하는.
작렬하는 태양에 바래가기만 하는.
그런데 요즘은 내가 여름 안에 있나, 나는 여름인가 그런가.
그런 생각들이 들어. 자라나고 싶거든, 아주 가열차게.
봄 동안은 내가 가진 씨들을 굴려보고, 또 몇 가지를 더 구해보고
여기저기 심어 보기도 했어.
미처 트이지 못한 씨들을 잊기도 하고, 아니면 그 환상통에 시달리기도 하고, 또 작은 떡잎들을 만져보며 즐거워하기도 했지.
이제는 내가 가꾼 작은 정원에 나를 심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자라날 수 있는 시기이므로.
*
결, 너의 여름에 대해 말해줄래?
*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왔어.
그러더니 갑자기 구슬 아이스크림 크기의 우박이 두닥두닥 지붕으로 떨어졌어.
꽃샘 우박이다! 속으로 생각하며 재밌다고 웃었어.
오후에는 꽃구경을 갔는데, 막 피어나고 있는 꽃들이 가지에 단단히 붙어 있었어.
늘 맞이하는 봄이지만, 빈 가지에 하얀 꽃들이 피어있는 풍경은 늘 생경한 것 같아.
이번 봄, 눈에 담고 싶은 것들을 부족함 없이 담으며 지내길 바랄게.
2024.03.31. 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