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아, 민경이야.
이번 편지에는 '어떤 말을 담을까?'하며 써두었던 일기를 둘러봤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거 있지? 사실 지금도 무슨 말을 할지 못 정했어. (웃음)
그래서 네가 건넨 편지에 먼저 답하려 해. 좌우명에 대한 편지 말이야.
네 편지를 읽은 나의 느낌이 궁금하다고 했지? 흥미진진하고 고마웠어.
'늘 느끼고, 의심하며, 배울 것'
네가 고른 문장을 나도 옮겨 적어 두었어. 나는 이 말을 '깨어 있을 것'이라는 말로 이해했어. 신체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잠이 보약이지), 감정과 사고를 늘 깨워두는 일 또한 쉽지 않은 일이야. 감정, 또는 사고를 깨워둔다는 건 외부 자극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깨어있는 건 종종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기도 하지. 끔찍한 사건들이 매일 일어나고 있으니까 말이야. 가끔은 일부러 스위치를 끌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 그것 역시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 죄책감과 맞설 용기. 어렵겠지만, 먼저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걸 네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럼에도 나는 깨어 있는 시간이 더 많기를 바라왔던 것 같아. 깨어있어 수모를 당한 적도 많았지만 지금 내 마음 깊이 새겨져 있는 시간들은, 모두 깨어 있는 상태에서 맞은 것들이거든.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웃음)
그럼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보자.
'이 순간만으로 남은 생이 모두 유효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드는 순간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순간들.
이런 순간들은 아주 힘이 세고 무겁지.
죽음을 압도해 버리니까.
이번 주도 그런 순간이 있었나?
크고 굵직한 일들이 많았지만, 지금 너에게 말해주고 싶은 순간은 아주 미세해.
화요일에서 수요일로 넘어가던 새벽이었어. 잔잔하게 내리던 빗줄기가 두터워져 내 창에도 그 소리가 닿았어. 침대에 누워 있다 몸을 일으켰어. 창을 열어 가로등 아래로 빛처럼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고 '거짓말'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어. 너무 좋을 때 나는 그 단어를 떠올리곤 해.
빗소리를 들으며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맥박이 조금 빠르게 뛰었어. 마치 달리기를 하는 사람처럼. 사실 그날 낮 시간 내내 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하루종일 맥박이 좀 더딘 느낌이 들었거든. 잠든 상태였다고 해도 좋겠다. 그런데 빗소리를 듣고 다시 깨어난거야. 그러니까 오늘 내가 느낀 마음들이 떠올랐고, 네 줄의 글을 썼어.
텅 빈 수레 같은 날
감정뿐이야.
감정으로 가득 찬 나는
홀로그램 인간 같다.
글로 적는다고 낮 시간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빗소리에 기대 적은 네 줄의 글로 나는 여한이 없어져 잠들 수 있었어. 사실 조금 행복했어.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지만 그걸 내가 직시하고, 글로 표현하여 남겨두었다는 게 좋았거든.
네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는지 궁금해.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느낌이 드는 순간.
나와는 아주 다른 결의 순간일지도,
또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더 궁금해.
답장 기다릴게.
그리고 이번 주에 찍은 사진도 함께 동봉해.
편지 맥락과는 관련 없겠지만,
혹시나 네가 허전해 할까 봐.
그럼, 이번 한 주도 우리 건강하게 지내다,
다시 만나자.
2022.04.17. 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