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비가 오는 어린이날,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상담심리학 공부를 시작한 후로는 꽤 오랜 시간 문학 글쓰기를 하지 않았었어. 그런데 요즘 예전에 썼던 극을 다시 쓰고 있어. 소설, 시, 에세이는 그간 쭉 써왔지만 희곡은 7년 동안 한 번도 새 글을 쓰지 않은 터라. 갑자기 샘솟은 희곡에 대한 열의가 생경하고 궁금했어.
지금 생각해 보니, 갑자기 희곡을 쓰고 싶어진 게 아니라, 7년 전 마무리한 그 이야기에 더 이어서 하고 싶은 말이 생겨서 극을 쓰기 시작한 것 같아.
두 가지 사건이 있었어.
*
날이 아주 화창했던 지난 4월의 한 날, 외할머니가 영면하셨어.
수업을 듣다가 전화를 받았고, 짐을 챙겨 서울역으로 갔어.
대구로 가는 기차 밖 풍경은 온통 푸르렀어.
세상은 온통 가볍고 마음은 무거웠어.
어린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심겨 있는 조용한 시골길을 내려다보았어.
작게 난 나무그늘 하나하나가 연못 같았는데,
가볍게 입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로 원 없이 저 길을 걸어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오후에는 중환자실에 계신 할머니를 만났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깻잎장아찌를 죽죽 찢어 드시고, 핸즈커피 와플을 맛있게 드시던 할머니가 지금 의식이 없으시다는 게 심정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가 않았어. 면회를 함께 들어간 사촌 언니, 오빠 그리고 동생과 함께 기도문을 읽었고, 할머니 귀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한 명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했어. 할머니의 손을 잡아 보았어.
할머니는 그날 저녁에 영면하셨어.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하고, 납골당에 할머니를 모시는 그 3일 내내 날이 참 좋았어. 하루는 한밤 동안 비가 세차게 내렸는데, 그다음 날에는 더 화창한 얼굴을 보여주었지.
*
그리고, 사월에는 인상 깊은 책 한 권을 읽었어.
<서사의 위기>라는 한병철 작가의 에세이야.
책에서는 오직 정보만 존재하고, 서사는 사라진 지금의 시대가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 흩어지게 하는지, 즉 서사로서 구성될 수 있는 개인의 고유함이 어떻게 파편화되고 있는지 설명하고 그것을 신랄하게 비판해.
나는 그 비판에는 모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작가가 추구하고 설파하고자 하는 서사의 중요성에 깊이 공감했어. 많은 주장 중에서도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을 겪은 개인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하게 된다'는 이야기와
”이제 콘라드의 세계는 더 이상 설명 가능하지 않다. 그의 세계는 이제 객관적인 사실들이 아닌,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 그래서 이야기가 필요한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서사적 전환은 그를 작은 이야기 공동체의 일원으로 만든다.” (77쪽)
서사는 개인 이전에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에 의해서 관통되어 꿰어진 사건들이 그 개인의 서사를 이룬다'는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들었어.
“하이데거의 자기 존재는 서사적 삶의 맥락에 선행한다. 현존재는 맥락을 형성하는 세계 내부적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자기는 연결된 세계 내부적 사건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에 의해 관통당한 전 서사적 ‘전체 실존의 신장성’만이 ‘고유한 역사성’을 형성한다.” (44쪽)
그리고 자신의 서사를 말하고, 다른 이의 서사를 들어주는 행위, 즉 '이야기를 나누는 것'의 치료적 의미와 중요성을 다룬 부분에도 깊이 공감했고, 그런 주장이 아름답게 받아들여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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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를 납골당에 모시고, 이틀을 더 지낸 후 다시 기숙사로 돌아왔어.
아침을 넉넉하게 먹었는데도 기차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고 학교 앞에 도착하니 배가 고파서 묵은지 참치 김밥 한 줄을 사 먹었어. 그리고는 기숙사 방에서 과제를 했었나,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저녁에는 일기 한 편을 썼어. 일기를 쓰며 알아차리게 된 몇몇 마음이 있었고, 하게 된 몇몇 다짐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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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6. 기숙사에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숨을 거둔 뒤 얼마간에도 청력은 살아 있다는 이야기는 보편적인 사실이다. 외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마주하던 면회 시간에 할머니 귀에 대고 무어라무어라 다들 한 마디씩을 하고, 입관 때도 그러하였다. 이모들이랑 외삼촌들, 이모부들과 사촌들, 동생과 아빠와 엄마 모두 울었다. 이모들은 크게 울었다. 그 장면에 속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장면을 떠올렸다. 사오월의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무당벌레가 이슬 맺힌 나뭇잎 위를 도도도 지나가는 것처럼 마지막 말을 전하는 장면. 울음 없이, 기쁜 노래를 부르듯이.
나도 그런 리듬으로, 할머니가 카카오톡을 만든 후에 내게 문자를 주어 너무 좋았다고, 꽃 사진을 주고받고, 안부를 묻는 그 순간이 즐거웠다고. 할머니 집에서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함께 밥을 먹었던 시간이 행복했다고, 오래된 드라마를 멍하니 함께 보는 시간이 좋았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말을 할머니에게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이 말을 포괄하는 말을 전하기는 했다.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들이 행복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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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의 관계에서 나는 후회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일기를 쓰며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그런 이야기를 전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어. 너무 요약해서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가 함축된 말을 건넬 수 있었던 건 참 다행이었지만.
다음에는 울지 않고 그런 말들을 전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서 이제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느낀 감정을 일상적으로 전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면 그 관계의 끝에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나의 애도의 방식을 20대 초반에 미리 정해두었었어. '미리'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때는 아직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죽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지. 맨땅에 할 수는 없기에 극을 썼었고, 지금 내가 덧붙여 쓰고 있는 극이 바로 그 극이야.
할머니를 배웅하면서 그 극, <장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의 장면들이 종종 떠올랐어.
나에게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건 장마야.
우산으로도,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고, 그저 겪어야 하는 어떤 것.
내가 그때 정한 애도의 방식은 그 비를 온전히 맞는 것이었어.
다만 혼자는 너무 슬프니까, 그를 함께 아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저 일기를 쓴 직후, 누군가 오월의 새처럼 조잘거리며 이야기를 전하는 장면을 맨 앞에 넣어 <장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다시 쓰기 시작했어.
너와 내가 함께 아는 이야기가 너와 나의 이별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두 번째로 <장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탈고하는 날에는 무언가 조금은 알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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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너는 어때?
너와 너의 곁 사람들 사이에서 네가 경험한 마음들을 그들에게 전하며 지내고 있니?
*
오월이야.
새봄의 달뜬 분위기가 지나가고, 이제 초록 이파리들이 풍경을 만들어 주고 있지. 가을까지 오래도록 곁을 지켜줄 초록 잎들 아래에서 깊은 안정감을 느껴.
결, 만약 밤 산책길에서 아카시아를 만난다면,
걸음을 잠깐 멈추고 눈을 한번 감아보길 추천해.
아카시아 향은 눈앞이 캄캄할수록 진해지거든.
그럼 결,
우리 이 오월을 반갑게 지내고, 다음 달에 또 안부 나누자.
맑은 시간들이길.
2024.05.05. 민경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