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유월의 첫 번째 날,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
나는 여전히 두툼한 겨울 이불을 발아래 놓아두고 잠을 청하지만, 한낮에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풍경들은 하나같이 여름이 왔다고, 이제 겨울 이불은 넣어두라고 말하는 것 같아. 풍성하고 옹골차게 뭉친 구름과 큰 나무, 작은 나무 할 것 없이 빽빽하게 잎을 채운 가로수들을 볼 때 특히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아.
이번 여름은 유독 소리소문 없이 찾아온 것 같아. 유난스러운 봄의 미세먼지가 없었기 때문일까? 이상 기온으로 봄에도 슬쩍슬쩍 여름을 맛보았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한여름이 온다면 '아 맞다, 이런 게 바로 여름이었지'하며 그 계절에 압도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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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월에는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어. 동기들과 깜짝 피크닉을 다녀오기도 했고, 같이 험난한 과제를 했던 박사 선생님과 뒤풀이를 가지기도 하고, 독서모임과 일기 쓰기 모임에 가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
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무척이나 가깝게 살게 된 친한 언니 동네에도 여러 번 놀러 가고, 오래 못 보았던 지인과 만나 안부를 나누기도 했어. 가족들과도 시간을 보냈고. 그리고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일 년 전 쓴 편지에 답장을 받았는데,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그 편지를 보내준 언니랑 같이 있는 기분이 들었어.
무수한 대화 중 한 장면, 내가 했던 한 마디가 떠올라.
'사는 게 영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저는 태어나서 기쁘거든요'
왜 아이를 낳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냐는 지인의 질문에 답하던 중이었던 것 같아. 내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을 내 귀로 듣는데 순간 생경한 기분이 들었어. 나도 몰랐거든, 내가 태어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 말을 내뱉으면서 머릿속으로 여러 관계들이 스쳐갔던 것 같아. 내 삶을 기쁘게 만드는 건 팔 할이 인간관계니까. 물론 사는 걸 영 힘들 게 만드는 것도 사람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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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교가 없어서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나가야 했어.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관계'가 자리 잡게 되었던 것 같아.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감정을 경험하는 것. 그게 내가 찾은 내 삶의 의미야.
그래서 나는 관계를 맺고, 관계를 유지하고, 또 관계를 끊고,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데 나의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 같아.
오늘 편지에서는 내가 오월에 한 관계에 대한 중요한 생각 두 가지를 너와 나누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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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내가 지난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인데, 관계를 책임진다는 게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이야.
'책임'이라는 단어는 내가 맺는 관계들과는 크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어. 나는 주로 유희적인 관계를 맺어 왔거든.
좋은 일을 나누고, 웃긴 이야기를 하고, 맛있는 걸 먹고, 수다 떨고, 놀고... 그런 긍정적 에너지를 나누는 게 좋았던 것 같아. 힘든 이야기나 감정을 나누는 관계는 소수였고, 그마저도 늘 농담으로 마무리하곤 했지. 그게 좋았는데, 지난봄에 처음으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한 지인이 내게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잘 나누지 못하는 걸 깨닫고 그런 생각을 시작했던 것 같아. 말하고 싶지 않으면 내게 말하지 않아도 되지만, 지인은 내가 필요함에도 잘 이야기하지 못하는, 또는 이야기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경우였어. 이전부터 우리 관계가 너무 조심스럽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큰 문제를 느끼지 못했는데, 힘든 일을 겪은 지인이 그 일이 일어났던 그 순간에는 내게 연락하지 않고, 한참 뒤에 소식을 전하며 그때 내게 말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고,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나는 그때 그 지인을 처음으로 책임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책임을 진다는 건 뭘까?
<사랑의 기술>에서 에리히 프롬은 책임을 '응답할 수 있고,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어. 그러니까, 내가 그 지인을 책임진다는 건 그에게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그에게 내가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알리는 게 되겠지.
그에게 응답하기 위해서 내가 달리 준비해야 할 건 없었어. 우리가 서로에게 응답할 수 있다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우리는 친해졌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건 그 지인이 모르고 있는 것 같았어. 그걸 알려주고 싶어서, sns에 의미심장한 소식이 올라올 때 평소와 다르게 마음을 묻고, 이야기를 나누었어. 그리고 앞으로는 기쁜 일만큼 슬픈 일도 나누면서 지내자고 이야기했지.
그리고 그것의 나비효과로, 다른 지인들에게도 그런 마음이 생겼던 것 같아.
그렇게 오월에는, 맑은 날씨 속에서 조금 더 책임지고 싶은 사람들이 생겨났던 것 같아.
유희에 책임이 더해진 관계는 어떤 국면을 맞이하게 될까?
그 변화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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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오월은, 양가감정이 출현한 달이기도 했어.
나는 사람에게 쉽게 호감을 가지는 사람이야. 그 마음을 처음에는 숨겼다가(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으니까) 상대의 호감을 인지하면 더 편하게 그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지. 시작하는 관계에서 오는 기쁨은 언제나 새롭고 귀한 것이라 그 시기에 푹 빠지는 것 같아. 하지만 이제는 알지. 언젠가는 서로가 서로를 조금은 실망시킬 수밖에 없다는 걸. 그 실망이 시작되는 시점을 나는 양가감정의 출현 시점으로 보고 있어.
지난봄에는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이 많았고, 앞서 말한 시작하는 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었던 것 같아. '와! 안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잘 맞다니! 이렇게 위안이 된다니! 이렇게 재미있다니!'하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어. 언젠가는 더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되리라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여름의 초입으로 가는 환절기에, 그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아. 흐르는 계절과 꼭 닮게도. 꽃을 여전히 품고 있으면서도 새잎을 밀어내는 나무 같은 마음으로 혼란스러워했던 것 같아. 혼란스럽기보다는 깊은 수치심을 느꼈어. 내게 기쁨과 행복을 준 사람들에게 미움을 품는다는 게 너무 수치스러웠어. 그때 내게 도움이 된 문장이 있어.
'자신의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최영민, 쉽게 쓴 정신분석이론 314쪽 中)
그 문장을 동아줄처럼 곁에 두며, 그들을 미워하는 것도 나지만, 그보다 큰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게 나라는 진실을 까먹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 내게 그걸 자주자주 알려주며, 되새기며 보냈던 오월이었어.
양가감정은 늘 너무 어렵지만, 진짜 관계는 양가감정 후 시작된다는 걸 알기에 한편으로는 감사함을 느꼈어.
여름을 맞이한 관계들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다음에 내가 동아줄로 붙잡을 문장은 무엇이 될까? 두려운 마음 반의 반, 기대되는 마음 반 더하기 반의 반으로 새로운 계절 속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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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너는 어때? 요즘 관계에 대해 하고 있는 생각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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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 방학을 맞이해.
대학 졸업 후에 내 생에 방학은 다시 없을 줄 알았는데, 네 번의 방학을 갖게 되었어.
사실 회사에 다니지 않아서, 내게는 매일이 방학 같기는 해.
공부도 하고, 본가에 가서 오래 못 보았던 사람들도 만나고, 건강도 챙기고, 콤플렉스도 좀 관리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 보고 있어. 얼마 전 유튜브 영상을 보았는데, 자신이 원하는 걸 이미 다 가진 것처럼 마음을 가지면 그 일들이 끌려온다고 하더라고! 그 말이 꽤나 흥미로워서 나도 그 방법을 이번 방학 때 적용해 보고 정말 효과가 있는지 실험해 보기로 했어.
마치 공부를 잘 끝낸 것처럼,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처럼, 건강해진 것처럼, 콤플렉스가 사라진 것처럼 마음을 가지고 살아보려고.
그럼 결, 다음에 또 편지할게.
그때면 정말 여름이 성큼 더 가까워졌겠다.
2024.06.01. 민경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