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너에게 편지를 쓰려 유월 달력을 한번 훑어보았는데.
'과연 이게 다 한 달 동안 일어난 일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잠깐 정신이 아득해졌어.
그 모든 이야기를 너에게 할 수는 없는데,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어렵게 통계 공부를 했던 일?
즐겁게 작성한 48페이지짜리 과제?
망한 소개팅 이야기?
대가에게 상담을 받고 온 이야기?
종강 파티를 함께 한 사람들 이야기?
결, 너는 어떤 이야기가 제일 궁금하니.
*
아침 내도록 부슬비가 내리고 습도가 90%였는데,
오전 일정을 마무리하고, 점심을 먹고 낮잠을 한 판 자고 일어났더니 블라인드 틈으로 볕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어.
미루었던 빨래를 돌려놓고 세탁실 근처 휴게실에 앉아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조금 몽롱하고, 파란 하늘 보니 웃음이 나고, 방금 앞 문장을 쓰다 한 번 더 하늘이 보고 싶어서 밖을 보았는데 거기 고양이가 있어서 또 행복해.
요즘은 감정을 느끼는 감도가 부쩍 더 섬세해진 것 같아.
기쁨도, 슬픔도 아주 쉽게 일고, 깊게 다가와.
오늘은 아무래도 망한 소개팅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위에 나열한 이야기 중 사실 꺼내기 가장 부끄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편지는 그런 일들을 적는 편지니까.
그리고 연애 이야기는 늘 재미있잖아?
왠지 너도 이 이야기가 제일 궁금했을 것 같아.
*
그 사람과 처음 연락이 닿은 건 유월 중순이었어.
일과 중에는 드문드문 일상을 나누다가, 그 사람이 야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부터 새벽 한두 시까지는 채팅창에 상주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어. 그렇게 사흘을 보냈더니 목소리가 궁금해서 통화를 했는데 전화를 끊고 나서 보니 통화 시간에 3시간 38분이 찍혀 있었어.
그 사람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마음에 들었어.
목소리를 알고 나니 얼른 보고 싶었지만 앞서 말한 꽉 찬 일정 때문에 6월 30일 전에는 시간이 나지 않아 애가 탔지.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소개팅 날 전에 그렇게 진득하게 연락하는 거 아니라고 충고를 들었어. 그런가? 싶었지만 이미 하고 있는 연락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그 말을 흘려들었지. 하지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 정이 너무 쉽게 들어버리기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아.
오랜만에 촘촘히 하는 연락은 좋기도 하고 에너지가 너무 쓰이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 일상이 나 혼자일 때는 주욱주욱 끊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느낌인데, 연락을 시작하니 마디마디가 잘려나가는 느낌. 그래도 그때는 재미가 더 컸어.
그렇게 계속 연락을 이어나가며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어.
이 사람은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걸 줄 수 있는 사람인가?
나는 그 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는 걸 가지고 있는가?
그런 질문을 곱씹었던 이유는 쉬운 연애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야.
한 번은 지난 연애들을 돌아보며, 내가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생각한 날이 있었는데,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걸 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 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는 걸 내가 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도달했었어.
그래서 다음 연애를 하면,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걸 애쓰지 않고도 내게 줄 수 있고, 그 사람에 대해서도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
그렇게 연락을 시작한 지 열흘이 지나던 어느 날, 친구들의 조언이 갑자기 커다랗게 다가왔어.
이렇게 하다가는 실제 얼굴도 보지 않고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될 것만 같아서 무리해서 약속을 잡았어.
일정과 일정 사이 3시간이 있는데 괜찮겠냐고 그 사람에게 물어보았고, 그 사람은 좋다고 했어.
실제로 만난 그 사람은 사진과는 얼굴이 약간 달랐지만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었고
먹을 것을 잘 사주고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어.
밥을 먹을 때 상대가 잘 먹고 있는지 살피고,
누가 봐도 손이 다 닿는데 자꾸만 반찬 그릇을 앞으로 옮겨 주는 착한 사람이었어.
사회적 민감도가 높은 사람.
그렇게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나누어 먹던 시간이 좋았지만, 그 사람과는 그날이 마지막 만남이었어.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건 대화를 통한 감정적 교류.
너무 추상적인 것이라 그 사람이 그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 바로 판단하기 어려웠어.
그 사람이 가장 필요로 했던 건 현실감각이었던 것 같아.
하지만 내게 그것은 희박했지.
그래서 약간은 안타까운 대화가 이어졌어.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걸 서로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만 같다는 판단이 올라오지만, 이미 정이 들어버려서 계속 질문을 던지며 정말 없나? 없어? 하고 무언가를 애타게 찾는 사람들의 대화가 이어졌어.
없다는 결론에 둘 다 도달한 것 같았지만, 원래 잡아두었던 6월 30일의 약속을 어떻게 하지는 않고 헤어졌어.
하루 정도 생각을 해보았는데, 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통화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어.
약 열흘 동안 즐거웠고, 과제로 쉽지 않은 시기였는데 덕분에 잘 보낸 것 같다고 고맙다고, 혹시 우연히 만나면 웃으며 인사하자고 마지막 말을 전했어.
그 사람이 뭐라고 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
열흘 연락하고
세 번 전화하고
한번 봤을 뿐인데
그 사람과의 대화방에서 나오고
번호를 지우고, 카톡 프로필을 지우는데
마치 헤어진 듯 마음이 아팠어.
너무 쉽게 빨리 정이 들어버리는 나를 잠깐 원망하려다가
그러지 않고, 그냥 슬퍼하기로 했어.
그러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어.
*
결, 너는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가장 필요로 하니?
*
'망한 소개팅'이라고 자극적으로 표현했지만, 사실 이 만남이 망한 만남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중에 생각하면 첫 번째 소개팅 상대로 참 좋았다고, 재밌었다고 기분 좋게 회상할 수 있을 것 같아.
*
저녁에는 제육볶음을 시켜서 아까 집에 오는 길에 샀던 두부랑 같이 먹을 거야.
이제 건조기는 30분 정도가 남아 있고, 너에게 보낼 편지의 초고도 완성했고
완벽에 가까운 일요일 저녁인 것 같아.
결, 칠월에는 쉽게 행복해하고 또 슬퍼할 일에 슬퍼하기를
그리고 늘 건강하길 바라.
그럼, 우리 다음 달에 또 만나.
2024.06.30. 민경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