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개강을 하루 앞둔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이 편지를 열어본 너는 무얼 하던 참이었을까?
오늘은 괜히 그게 궁금하네.
*
얼마 전 한 어른으로부터
'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어.
그때 나는 속으로
'왜 그래야 되지?' 하며 반항 어린 생각을 했었어.
내게는 늘 마음이 중요했었거든,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을 때면
(가령, 놀고 싶은데 몸이 아프다거나 하면)
몸이 밉고 몸에 갇힌 것 같고, 몸이 없었으면 바라기도 하며,
몸을 마음의 하수처럼 부리며 무시해 왔던 것 같아.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포기하지 않고 그 어른은
지금 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라 권했어.
그 말을 듣고 몸의 상태를 살펴보았어.
명치 부근이 무겁고 상체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어.
몸이 그러고 있는 줄 몰랐던 나는 조금 놀라서
몸에게 어색하게 물어보았어.
'그... 너... 왜 그래??'
몸이 대답했어.
'여기서 나가고 싶어'
몸의 그 대답을 듣기 전에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마음이었어.
당시 머리는 그 어른과의 대화를 잘 이어나가야 한다고 굳게 생각하고 있었고, 나는 늘 생각이 마음의 전부라 믿는 사람이었었거든.
그때 알게 되었어. 마음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는 걸.
하나는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생각.
하나는 몸을 통해 발현되는 느낌.
둘 중에 더 정확한 것을 꼽자면 아무래도 후자일 것 같아.
전자는 의식적인 과정이기에 통제나 조작, 억압이 더 쉬울 테고,
그에 비해 몸은 솔직하고 통제가 어려우니까.
"몸이 여기서 나가고 싶대요"
그 어른에게 말했어.
그리고 곧 대화가 마무리되었고, 나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장면을 복기하면서 작게 웃었어.
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마음을 들여다보는 가장 크고 투명한 창문인 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던 게 조금 어이가 없었고, 이제 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 게 기뻤어.
그 후로는 틈만 나면 몸에게 물었어.
'지금 어때?'
'좋아? 싫어? 피곤해?'
'뭐 어떻게 하고 싶어?'
몸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아마 귀찮음을 느꼈을 거야.(웃음)
그 뒤로 변한 게 있다면, 비교적 선택이 쉬워졌다는 것.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이렇게 하면 이게 문제고, 저렇게 하면 이게 아쉬운데'
하며 이전에는 생각으로만 결정했다면 이제는 조용히 몸을 살피고 몸이 더 편해지는 방향으로 선택하고 있어.
그리고 부적응적인 습관 몇몇이 개선되었어.
무언가를 먹을 때 과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몸에 집중한 후로는 배가 부르다는 몸의 신호를 잘 알아차리고 음식 먹기를 멈출 수 있게 되었어. 그리고 수면에 대해서도 늘 '6시간은 자야 해!'라는 규칙 하에 전혀 잠이 안 오는데 괴롭게 누워있거나 이르게 깨어났을 때 억지로 잠에 다시 들려고 애쓰던 때가 많았는데, 이제는 몸에게 가만히 물어보고 일어나고 싶다고 하면 일어나고, 자고 싶다고 할 때 잠자리에 눕는 습관이 생겼어. 절대적인 수면 시간은 조금 줄었지만, 수면에 대한 스트레스가 줄고, 수면의 질도 좋아진 것 같아.
오늘 편지에서 하려던 주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최근 생활의 질을 높여준 놀라운 발견이라서 너에게도 꼭 말해주고 싶어 길게 길게 이야기를 해보았어.
결, 너의 몸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니?
*
이제 원래 오늘 하려던 이야기를 시작할게.
나에게는 나를 설명하는 많은 문장들이 있고, 그중 몇 개는 아주 핵심적이지.
그런 문장들 중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문장은 바로 이거야.
'거의 모든 변화 상황에 애도가 필요한 사람'
애도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하면 대체로 누군가와 사별한 사람을 떠올리겠지만,
나에게 애도가 필요한 사건은 [죽음]으로 인한 (사람과)의 이별뿐만이 아니야.
( )에는 사람뿐 아니라 다른 생명체, 한 시기(시간), 장소, 그리고 때로는 나를 넣을 수 있겠고
[ ]에는 죽음뿐 아니라 이사, 졸업, 헤어짐 그리고 아무 사건 없이 그저 시간의 흐름을 넣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다양한 조합으로 나는 늘 애도가 필요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돼
참 신기하면서도 지긋지긋한 점은,
그렇게 많은 애도를 거치며 살아왔는데도 늘 그런 상황이 오면 처음처럼 슬퍼한다는 거야.
그 슬픔의 모양새가 끈질기게도 닮아있다는 것
매번 똑같이 슬퍼하는 나를 보면 내가 나약하다는 생각이 들고, 바보 같기도 하고 이런 내가 싫고, 그러다 보면 삶이 두렵고 어렵게 느껴져. 그래서 나에게는 저 문장이 나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문장이라는 사실이 참 어려워.
결, 너에게도 묻고 싶어.
너를 설명하는 문장 중, 네가 가장 어려워하는 문장은 뭐야?
*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애도 미션 덕분에 어쩌면 나 조금은 애도의 달인이 된 것 같기도 해.
마침 지난 8월에는 '애도상담'에 대한 강연을 듣기도 했는데, 거기서 설명하는 애도의 방법이 내가 줄곧 사용해 왔던 전략과 비슷했어.
상실에 의미를 부여하여 상실을 자기 삶의 이야기 속에 통합시키는 것.
그게 강연에서 설명한, 그리고 내가 써온 애도의 방식이야.
나는 상실에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내 삶의 이야기 속에 통합시켜 왔어.
나는 내 삶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방식으로 엮어가고 싶기에, 상실을 그 이야기에 속하게 하기 위해서는 상실 사건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야 했지.
-무언가 마음을 주었던 게 일순간 사라지는 것.
여기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질문을 적는데 명치 부근에 작은 연못이 파인 것처럼 묵직한 느낌이 들고 눈가가 뜨거워졌어, 몸이 이러는 거 보니... 나 지금 슬픈가 봐!)
상실의 전제 조건은 '무언가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야.
'무언가에게 마음을 주는 건' 내게 의미 있는 일이고, 또 아름다운 일이지.
그렇기에 상실감은 내가 의미 있는, 아름다운 일을 경험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거지.
이게 내가 상실에서 찾은 아름다움이야.
올여름, 방학 동안 머물렀던 대구를 떠나 다시 서울로 돌아오면서도
그 아름다움에 주목하려 노력했어.
대구에서 함께 지냈던 사람들, 그 사람들과 나누었던 마음들, 여름 풍경들과 소리, 애쓰던 시간들에 내가 참 많은 마음을 주었구나, 그래서 그 시간이 내게 소중해서 지금 이런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그 감정이 마땅히 느껴야 할 것처럼 여겨졌고 지난 두 달의 희로애락과 아름다움의 증거로 받아들여져 내 삶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적어 둘 수 있었어.
이제 방법은 조금 알지만, 상실과 애도는 늘 새롭고 늘 어려워.
앞으로 겪을 상실의 난이도는 점점 더 높아질 것 같아.
하지만 나도 부지런히 실력을 쌓아가고 있으니, 괜찮을 거야.
그렇겠지?
*
정말이지 대단했던 여름이라서,
푹푹 찌는 날씨에 온전한 정신이 귀했던 여름이라서,
이번 여름과 헤어질 때는 애도가 필요 없을 줄 알았어.
그런데 말이지,
폭우가 두 시간 쏟아진 어느 날, 갑자기 불기 시작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데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더라.
힘들었지만, 이번 여름을 미워하기만 했던 것 아니었나 봐.
-
결, 이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가을이 오고 있어.
(신난다!)
가을에도 계속 편지할게.
구월, 높고 푸른 하늘을 자주 바라보며 지낼 수 있길 바라
2024.09.01. 민경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