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오늘 수업을 듣다가 수첩에 이렇게 적었어.
-오늘은 무결레터를 써야겠어 마음이 터져버릴 것 같아.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지.
-근데 또 너무 재밌다
내 시월은 이랬어. 터져버릴 것 같지만, 너무 재미있는. 그런 날들을 보냈어.
결, 너의 시월은 어땠니?
*
시월 내내 글을 쓰고 싶었어.
귀한 감정을 많이 느꼈고, 그걸 최대한 생생하게 남겨(마치 박제한 것처럼) 오래 들여다보고 싶었거든. 근데 글 쓸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쓰리라!’하며 그 감정들을 붙잡아 두었지.
그렇게 하나하나 다람쥐 볼 주머니에 도토리 모으듯 넣어두다가, 시월 마지막 날인 오늘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터져버릴 것 같은 지경이 되었어. (웃음)
그럼에도 많은 감정이 휘발되었고, 그게 무척 아깝지만, 이제는 마음을 비워두려고 해. 다음에 찾아올 감정들을 위해서. 하지만 그전에 꼭 남겨두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어. 너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어떤 마음이.
*
평범한 금요일이었어. 저녁 상담이 있었고, 조금 피곤했기에 상담하다가 하품이 나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던 어느 금요일. 상담소로 가는 전철은 붐볐고, 상담소 주변에서 행사가 열려 거리가 시끌벅적했지. 겉옷으로 입은 카디건이 두터웠는지 이동하는 동안 열이 올랐고, 열기를 식히려 저녁으로 냉우동을 먹었어. 적당히 달고 짠 육수와 고소하게 튀겨낸 튀김 고명이 마음에 들었어.
상담소에 도착해서는 양치를 깨끗이 하고 얼굴 근육도 한번 풀어주고, 내담자 자리에 앉아서 시야에 걸리는 건 없는지 확인하고, 내 자리로 돌아와 내담자를 기다렸어.
첫 번째 상담이 끝나고, 두 번째 상담이 시작되었어. 이때만 해도 이 내담자와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미세하지만, 내담자님은 다른 날과 달리 편안해 보였어. 그래서 나도 조금 상기되었던 게 기억나. 안부를 나누고, 바깥에 사람 진짜 많다며 어색함을 조금 깨고, 지금 마음이 어떤지 탐색을 시작했어. 내담자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어…어?’하는 목소리가 올라왔어. 그 소리가 ‘맞는 것 같아’라는 말로 바뀔 때 즈음 내담자님에게 물어보았지.
“상담이 계속 필요할 것 같으세요?”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종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대로 종결했어.
웃으며 인사 나누고, 고마웠던 점을 건네고 이후의 날들을 응원하는… 아주 깨끗하고 다정한 종결이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슬픔이 올라왔어. 정말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어서, 이게 맞나? 내가 판단을 잘못했나? 성급했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어.
지하철에서 내려서도 그런 생각을 하느라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그렇게 홀린 듯이 동전 노래방에 들어가 4곡 연속 이별 노래를 부르는 나를, 그러면서 울먹이는…(웃음) 나를 보며 알게 되었어. 그 내담자분이랑 이제 못 보는 걸 내가 너무 슬퍼한다는 것을.
언젠가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어.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애도가 필요 없는 종결을 줘야 해.”
그 시간으로 돌아가 교수님께 묻고 싶었어.
“상담자에게 애도가 필요할 때는 어떻게 하죠…”
사실 물을 것 없지. 나는 애도의 달인이니까. (갑자기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네…‘애도를 잘하라는 게 아니라, 애도가 필요 없는 관계를 맺으라고!’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그건 어려울 것 같아.)
저렇게 슬퍼하는데 뭐가 애도의 달인이냐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잘 슬퍼하는 것이 애도를 잘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이제 사라져 버렸지만, 애도를 필요하게 할 만큼 친밀했던 관계에 대한 생각을 피하지 않는 것. 그 관계에서 나눴던 것, 좋았던 것, 조금 나빴던 것, 아쉬웠던 것들을 생각해 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관계를 누리고, 또 잃은 나를 충분히 나로서 받아들이는 것. 이런 과정에서 슬픔을 피하긴 어렵겠지만, 나는 이때의 슬픔을 ‘양질의 슬픔’이라 생각하기로 오래전에 다짐했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날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잔잔하게 슬픔이 밀려와 그리고 이제는 꽤나 작은 목소리가 되었지만 ‘정말 내가 제대로 판단한 건가?’하는 물음도 함께.
그럴 때면 내담자님이 해주었던 말을 생각해.
‘다시 우울해지면 찾아와도 되냐’는 말. 그 말로 내 마음을 다독여. ‘다시 우울해지면’이라는 말은 지금은 우울하지 않다는 말이니까. 그리고 다시 찾아와도 될 곳으로 나를 생각해 주셨다는 것도 내게 감사한 일이지, 나를 조금 더 믿을 수 있게 도와주는 어떤 마음.
이제 매주 만나지는 않지만, 문득 내담자님이 떠오를 때면 내담자님의 마음이 안녕하시길 작게 빌어. 티 없이 맑은 마음으로.
*
결, 너에게도 떠오르면 안녕을 빌게 되는 사람이 있니?
*
첫 번째 종결을 한 것 말고도 시월에는 악몽을 크게 꾸기도 했고, 자격증 시험을 치르고, 처음으로 슈퍼비전(경력 있는 상담사에게 내가 상담한 걸 피드백 받는 거야)도 받아보고, 또 한 차례 어떤 사람과 연락을 정리했으며, 나의 애착 상담사님께 상담을 받고 오기도 했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집단인 은둔형 외톨이 당사자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연구에 대한 동의를 받았고, 수업도 열심히 들었어. 그리고 여기에 적지 못한 또다른 많은 일들이, 마음들이 있었지.
신경 쓰는 일들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을 예전처럼 챙기지 못해 마음이 쓰여 한 친구에게 이 마음을 이야기했더니 친구가 이렇게 말해주었어.
‘민경~ 니가 지금 신경 써주는 정도가 다른 사람들 평균이야~’
정말일까? 내가 내 사람들에게 받는 마음은 늘 내가 주고 있는 마음보다 큰 것 같아서 거기서 조금 더 줄어든 지금이 불안했는데 친구가 그렇게 말해주어 고마웠어.
-
연구도 잘하고 싶고, 상담도 잘하고 싶고, 수업도 잘 듣고 싶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싶은 요즘이야. 그래서 이렇게 단풍이 들고 있는 줄도 몰랐네.
너는 어떨까, 물들고 있는 잎들을, 조금 더 깊어진 하늘을 바라보며 시월을 보냈을지 궁금해.
이제 다음 편지에서는 겨울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아. 겨울이라니, 이제 한 해가 마무리되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네.
우리 올 한 해도 같이 잘 마무리해 보자.
지금 마음이 안녕한지, 종종 스스로에게 다정히 물으며 지내는 11월이길.
2024.10.31. 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