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올해 너에게 보내는 열한 번째 편지를 시작하며, 2024년이 시작되던 겨울에는 너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그런 생각을 잠깐 했어.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 걱정과 설렘을 전했던 것 같기도 하고, 대구를 떠나는 게 슬프다 이야기했던 것 같기도 해.
많은 시간을 건너서, 봄과 여름, 가을을 지나 다시 겨울로 돌아온 지금. 이제 대학원생이라는 게 익숙해졌고, 곁의 사람들에게도 익숙해졌지. 가족들의 장난 섞인 ‘상담사님~’이라는 호칭에도 제법 익숙해졌어, 들을 때마다 긴장이 되긴 하지만.
며칠 전에는, 아니 바로 어제는 기가 팍 꺾이는 일이 있었어. 슈퍼비전을 받고 왔거든. 슈퍼비전은 내가 상담한 내용을 수련 감독 자격이 있는 상담사에게 가져가 피드백받는 걸 말해. 슈퍼바이저 선생님은 목소리가 좋으셨고, 지식과 경험이 많으시고, 다정하신 분이셨어. 그래서 나 피드백을 받다가 그만 (아주 살짝) 울어버렸지 뭐야(웃음). 내담자에게, 상담에 왜 그렇게 애착을 가지는지 설명하다가 눈물이 고이는 나를 보며, 슈퍼바이저 선생님 눈에도 눈물이 조금 맺히셨는데...그걸 보고 울지 않을 수 없었어.
슈퍼바이저 님의 모든 피드백이 내게 도움이 되었어. 그중 한 가지는 뼈아프게 느껴질 정도로 핵심적이고 중요한 피드백이었는데, 내 기가 꺾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지. 선생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어.
“좋은 관계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담자가 자신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해요.“
그 말이 나를 두렵게 만들었어. 진실은 어떤 경우 불쾌한 것이기도 하니까. 그걸 내담자와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게 싫다는 생각이 들었어. 지금처럼 따듯한 분위기에서 같이 슬퍼하고, 같이 이해해나가 보자 하다가 아름답게 종결하고 싶은데, 진실에 가까워지려면 내담자가 상담 관계에서,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될 테니까. 가령, 실망감이나 억울함, 분노, 서운함, 답답함 같은 것들 말이야.
두려워하는 나를 보면서, 어쩌면 나는 내담자가 상담관계를,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이상화하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이미 그러고 있었던 것 같고.
특별함이든, 이상화든, 따듯한 환경이든, 의존이든, 상담 관계에 필요할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 다만, 상담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어야겠지. 그것이 목적이 되면 안 될 거야.
나는 왜 나도 모르는 사이 이상적인 상담관계를 목적으로 상담을 진행하고 있었던 걸까? 좋은 관계를 원하는 건 자연스러운 거니까? 아니면 이론과 기술을 쓰는 것보다는 그것이 자신 있으니까? 나에게 충족감을 주니까? 내담자가 떠날까 봐 불안하니까.
마지막 문장이 나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것 같아. 이 마음을 이렇게 기록해 두고, 왜 그게 불안한지 내게 계속 물어봐주어야겠어. 나의 상담사 선생님들이 물어봐주신 것처럼.
'왜 그렇게 불안하게 느껴지는 걸까요?' ‘지금 기분이 어때요?’ ‘지금 몸은 뭐라고 말하고 있나요?’ '또 비슷한 경우가 있었나요?'
‘그때 민경님에게 필요한 말은 뭐였어요?’ ‘나에게 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상담을 하면서, 이렇게 나의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도 참 좋아, 뼈아프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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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좀 꺾이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잘하는 거. 관계를 통해 따듯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 지금으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게 말해주며 어제도 내담자들을 만나고 왔어. 그런데 참 신기하지. 한 시간 그렇게 슈퍼비전을 받았을 뿐인데, 내담자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폭이 많이 넓어졌음을 느꼈어. 가령, 옛날에는 내담자가 지각해서 불만족스러운 마음이 들어도 ‘아니, 내담자한테 그런 마음을 느껴서는 곤란하지’하며 자동적으로 그런 마음을 눌렀는데 어제는 그 마음에 조금 머물러 보았어. 그런 감정을 모두 품고서도,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내담자의 관계를 경험하면서도, 내담자에게 안전하고 따듯한 관계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는 상담사가 언젠가는 될 수 있겠지. 그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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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에게 슈퍼비전 받은 이야기를 했더니, 동기는 진실의 미간을 찌푸리며(깊이 공감할 때 동기의 습관이야) ‘언니, 진짜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지금 너무 잘하고 있어, 그런 관계를 경험하게 해주는 것도 대단한 일이야’ 해주었어.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00이가 내 거울이네, 깨끗하고 예쁘게 나를 비춰주는‘이라고 생각했어. 동시에 내가 가진 거울이 조금 깨끗해지는 걸 느꼈어.
슈퍼비전을 함께 받았던 동료 선생님의 말에 영향을 받아 떠올리게 된 생각이었어. 동료 선생님께서 ‘내담자가 자기가 얼마나 예쁜지, 볼 수 있도록 거울을 닦아주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 마음이 너무 인상 깊었거든.
나는 자주, 거울에 얼룩이 생기는 사람인 것 같아. 그래도 그 얼룩을 그때그때 닦고자 하는 통찰력과 의지가 있음에, 곁에 같이 얼룩을 닦아주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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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너에게도 너의 거울을 함께 닦아주는 존재가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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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도 참 바빴어. 즐거웠지만, 그리고 지금도 즐겁지만...종강을 기다리고 있어.
일들이 정리된 후에 조용히 혼자 앉아 올해를 천천히 돌아보고 싶어. 올해에 대한 아주 긴 일기를 쓰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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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결, 점점 더 추워지는 날씨 속에서도 늘 몸 마음 건강히 지내길 바랄게. 안녕한 겨울의 초입이길.
앗, 다음 편지는 2025년에 보내게 될지도 모르니 미리 인사할게.
2024년 고생 많았어, 함께해줘서 고마웠어:)
2024.12.01. 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