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결, 민경이야.
지난 한주 별일 없었니?
가을이라고 시원하게 말하기 어려운 날들이 지속되고 있지만, 점점 짧아지는 낮의 길이만은 명백히, 지금이 동지로 가는 계절, 가을임을 말해주고 있어. 나는 매일 조금씩 일찍 돌아오는 밤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순식간에 사라지는 노을을 보면서 슬퍼하기도 해. 가을에 익숙해지기 전이라 그런 것 같아. 조금은 당황스럽지만, 환절기에 느낄 수 있는 이 반갑고 섭섭한 감정을 나는 아껴.
나는 준비해오던 행사를 무사히 끝마치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며 지난 한 주를 보냈어.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니, 자연스럽게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도 많아졌어. 주고받은 사랑을 가만히 곱씹으며 답 없는 질문을 배부른 사람처럼 떠올리기도 했어. "사랑이 뭐지?" 하고. 도처에 사랑이 있을 때도 이 질문은 여전히 어렵지만, 사랑과 먼 삶을 살 때처럼 무섭거나 두렵지 않고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 같아. 한가득 쌓아둔 사탕의 종류를 궁금해하듯이.
나는 사람들이 품고 있는 각기 다른 모양의 사랑에 관심이 많아. 그게 내 주변 사람의 것이라면 더더욱.
스스로 성장했다고 느꼈던 순간이 몇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사람마다 사랑의 모양이 다르고, 때문에 사랑의 언어와 사랑을 지시하는 행동이 다를 수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거든.
그때부터는 늘 사랑에 대해 궁금해해 왔던 것 같아. 특히 내가 아끼는 사람의 사랑에 대해 더 관심이 많은 이유는, 그 사람이 내게 건네는 사랑을 빠짐없이 알아차리고 싶기 때문이고, 또 내 마음을 그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전하고 싶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대뜸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이 뒷걸음질 치거나 깊은 생각의 동굴에 들어가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질문 하나를 개발했어. 그 질문은 바로 "사랑한다는 말과 가장 가까운 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야.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이 가진 사랑의 결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질문이기도 한 이 질문을 이번주에도 누군가에게 건넸어. 그 장면을 너에게 전하고 싶어.
*
거짓말처럼 미세먼지가 나빴던 날이었어. 파란 하늘에 익숙해졌던 터라, '매우나쁨' 표시가 뜬 알림을 보고도 저 뿌연 게 안개는 아닐까? 여러 번 의심하곤 했지. 하루종일 밖에서 놀아서 그런지, 달이 뜰 때즈음 되니 목이 갑갑하고 머리도 살짝 아파왔어. 나랑 친구는 그럼에도 강변을 둘러 걷고 있었어. 한강에 있는 노들섬이라는 곳을.
그날 섬에서는 행사가 있었어. 거리 공연과 체험 활동, 그리고 야외 오페라까지. 모든 이벤트가 끝난 후에 인파가 일순간 빠져 섬은 다시 텅 빈 상태로 돌아왔지만, 섬의 구석구석에 그 잔상이 어른거리는 것만 같았어. 원래 없던 곳 보다는 있다 없어진 곳이 더 쓸쓸하기 마련이니, 괜히 섬의 입장이 되어 조금 허무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섬을 떠나지 못하고 걷고 있었어.
친구와 나는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라, '만약에'로 시작하는 질문을 서로에게 많이 건네는 편이야. 걸으면서도 계속 '만약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서로에게 건네고 또 묻고 있었지. 그중, 친구가 얼마 전 다른 친구들에게 받았다는 질문에 마음이 오래 머물렀어.
"만약에, 너가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거하게 놀려고 애인한테 미리 말도 다 해놓고 나가 놀고 있었어. 그런데 1차 끝내고 막 2차 자리에 도착했는데 애인한테 연락이 온 거야. 아까는 괜찮다고 했는데 지금은 안 괜찮아졌다고, 당장 와줬으면 좋겠다고, 보고 싶다고. 그럼 어떻게 할 거야?"
그 질문에 친구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를 듣고, (친구는 애인에게 간다고 했어) 다시 다른 이야기를 했지. 그러다 갑자기 친구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 질문에 대한 내 이야기를 시작했어. 먼저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물었어.
나: 언니, 언니는 사랑한다는 말이랑 가장 가까운 말이 뭐라고 생각해?
친구: (한참 생각한 후에) 아.. 너무 어려운데, 나 세 개나 있는데..
나: 다 말해줘!
친구: 잘 잤어? 밥 먹었어? 보고 싶어.
나 : (잠시 생각한 후에) 언니한테 사랑은 일상의 언어구나. 그 사람의 생활에 마음을 쓰네.
친구 : 응, 안위를 생각해.
나 : 그리고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고.
사이
나 : 원래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궁금해"였어. 근데 이게 흥미랑 잘 구분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최근 다른 대답을 떠올리게 됐거든.
친구 : 뭔데?
나 : "네 외로움이 싫어"
친구 : 으응~
나 : 사랑하는 사람이 외로워하는 걸 못 참겠더라고, 그래서 내가 누군가의 외로움에 마음을 쓰고 있는 걸 볼 때, 내가 이 사람 사랑하는구나 싶어. 그리고 누군가 내 외로움에 관심을 둘 때, 사랑받고 있다 느끼는 것 같아.
친구 : 그렇구나.
나 : 그래서 아까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애인 보러 간다"야. 친구들도 물론 사랑할 테지만, 왁자지껄 모인 자리에 내가 빠진다고 친구들이 외로워할 것 같지는 않거든. 근데 말을 바꿀 만큼 아마 애인은 외로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 사람을 만나러 갈 것 같아.
그 이야기 후에도 친구와 나는 사람과 마음, 관계와 감정에 대해 오래 이야기했어.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대화들을 곱씹으며 "사랑한다는 말과 가장 가까운 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바뀐 내 대답이 꽤나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앞으로는 또 어떤 대답을 가지게 될까 궁금했지.
*
결, 아마 예상했겠지만 오늘은 노들섬에서 내가 친구에게 건넸던 질문을 네게도 물으려고 해. 네가 가진 사랑이 어떤 모양인지 궁금해. 네게 사랑한다는 말과 가장 가까운 말은 무엇이니?
*
얼마 전 좋다고 소문이 자자한 진은영 시인님의 시집을 샀는데 말이야. 사랑이 가득한 시인으로 유명해서 기대를 많이 하며 첫 장을 펼쳤어. 그 장에서 마주한 시인의 말에 나는 반가워 활짝 웃었어. 어쩌면 이 시집에 담긴 사랑의 결이 내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미처 이름 붙이지 못한 나의 마음들에 어울리는 말들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시인의 말은 아래와 같았어.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지."
헤르베르트의 시구를 자주 떠올렸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부쩍 날씨가 쌀쌀해진다고 해.
결, 감기 조심하고
우리 다음 주에 또 만나자.
2022.10.02. 민경 |